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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Mar 26. 2021

23주. 로마(2018)

2019. 12. 17. by 만정

나는 이야기광이다. 어릴 땐 할머니가 들려주시는 이야기에 빠져있었다. 주로 6.25 전후로 할머니가 겪은 ‘전쟁과 사랑’이었다. 피난민 처녀가 낯선 동네에서 시집을 가는 이야기. 요즘은 환갑을 넘긴 아버지가 이제야 조금씩 풀어놓기 시작한 어린 시절 이야기를 좋아한다. 동년배라도 비슷한 경험은 찾기 어렵겠다 싶을 정도로 시골마을에서 자란 소년이, 아버지를 잃고 집안 형편이 기울면서 겪은 이야기이며, 그 사이 이웃의 기기묘묘한 에피소드들이 교차된다. 어떤 이야기들은 얼음 속에 박제된 잠자리 날개처럼 선명해서 나는 그만 감탄하고 만다. 반면에 내게는 이야기가 없다. 어렸을 때라면 더더욱 없다. 나는 무너지는 다리를 간신히 뒤로 하고 달리는 사람처럼 과거를 쉽게 잊는다. 내 기억의 결핍 때문에 남의 이야기 듣기를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는 유년시절에 대한 가장 섬세한 회상 중 하나이다. ‘로마’는 1970년대 초, 멕시코시티 로마 지역-당연히 내가 사랑하는 ‘그’ 로마는 아니다-의 한 중산층 가정 이야기를 그린다. 감독의 기억은 흑백으로 재현된다. 집안일을 돌보는 젊은 여성 클레오는 피고용인이면서도 주인집 가족과 말 그대로 ‘가족 같은’ 사이처럼 정서적으로 가깝게 지낸다. 영화는 두 개의 주요한 사건을 따라 진행된다. 먼저, 미혼인 클레오가 임신하고, 그 사실을 알리자 사귀던 남자가 도망쳐버린다. 한편, 주인집에서는 다른 여자가 생긴 아버지가 가족을 떠난다. 그러니까 영화 ‘로마’는 클레오가 출산을, 가족이 아버지의 가출을 받아들이기까지의 여정이다. 


이 영화는 아이가 아닌 클레오의 시선을 따라간다는 점에서 다른 유년기 영화와 다르다. 심지어 영화 속 3남 1녀 가운데 누가 감독인지도 밝히지 않는다. 기억의 주인은 감독 자신이지만, 극의 중심에 선 인물은 클레오이다. 감독의 가정사 조차 클레오의 배경에서 벌어지는 부수적인 사건처럼 보인다. 70년대 가톨릭 국가의 미혼 여성이 혼전임신을 한 데다 그 사실을 안 아이 아버지는 사라져 버린 어마어마한 사건의 당사자인 클레오는, 그러나 평정심을 잃는 법이 없다. 뿐만 아니라 평소의 유쾌함도 거의 잃지 않는다. 배가 불러 아이 아버지를 찾아갔을 때 황당한 말을 들어도 여기에는 변함이 없다. 주인집 사정은 다르다. 남편이 떠난 후 소피아는 혼란에 빠진다. 아이들에게 알리지 않고 혼자 감당하려고 애쓰지만 좌절하고, 어쩔 줄 모르고 흔들리는 모습을 클레오는 때때로 목격하게 된다. 아버지가 떠난 비극적인 가족 이야기가 대수롭지 않은 듯 담담하게 그려진 것은, 클레오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방식을 취한 효과인지도 모른다. 


한편, 가히 제정신은 아닌 와중에도, 임신한 클레오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은 소피아이다. 클레오가 임신 사실을 알리자 소피아는 그녀를 해고하는 대신 병원에 데려간다. 반대의 도움도 성립한다. 남편과 아빠를 빼앗긴 가족을 돌봐주고, 아이들과 사랑을 주고받는 사람 역시 클레오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남자들, 그러니까 4남매의 아버지와 클레오 아이의 아버지는 떠나간다, 혹은 도망친다. 남겨진 아이들과 여자들이 서로를 돌봐준다. 


영화는 주된 사건의 성격과는 달리 슬픔이나 고통과는 거리가 멀다. 다루고 있는 소재나 사건이 아름답다고 하긴 어렵다. 그럼에도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아름다운 기억의 조각들이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천천히 움직이는 패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하로의 움직임은 영화 시작과 끝에서 등장하는 정도이며, 대개는 가로로 긴 화면비율의 스크린 속에서 좌우 방향으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천천히. 초반부에 주된 배경이 되는 집을 보여주는 방식도 마찬가지여서, 처음엔 거실이 있는 1층을, 그다음엔 가족들의 방이 있는 2층을 천천히 좌에서 우로 비춰준다. 여길 메우는 가구와 그 배치는 감독의 기억에 따라 세심하게 결정되었다고 한다. 집뿐 아니라 영화에 등장하는 에피소드 하나하나에서 깊은 애정이 느껴진다. 슬픔은 전혀 없는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는 느낌이랄까. 알폰소 쿠아론은 이 영화에서 감독뿐 아니라 촬영도 직접 맡았는데, 자기 기억을 재현하기 위한 필연적인 선택이지 않았을까 싶다. 시각예술이기도 한 영화에서, 자기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기억이라는 영상을 그대로 재현할 방법으로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내가 특히 좋아하는 장면은 이런 것이다. 주인집 막내 꼬마는-나는 이 아이가 감독이라고 짐작하는데,- 클레오에게 이런 말을 하곤 한다. “내가 할아버지였을 때, 클레오를 봤는데.. ”, “내가 할어버지였을 때 나는 뱃사람이었는데..” 마치 내 조카가 문법에 맞는 틀린 말을 하는 걸 볼 때처럼 놀란다. 대단한 깨달음을 주는 말 같아서이다. 또 다른 장면에서, 네 아이 중 두 꼬마는 우비를 입고 우박을 줍는다. 노래를 부르며 우박을 주워 바구니에 담는 모습이 귀엽다. 그 외에도 우주복 흉내를 낸 의상을 뒤집어쓴 아이들이 세 번 정도 등장한다. 인류의 달 착륙이 얼마 지나지 않은 때여서인지, 산에서, 들에서, 빈민가에서 나오는 우주복 입은 아이들이 흥미롭다. 이 감독이 영화 ‘그래비티’를 만들었다는 게 우연은 아닌 것 같다.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는 크리스마스 신이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에 이어 손에 꼽는 영화 속 크리스마스 장면이기도 하다. 가족과 클레오는 아버지가 없는 크리스마스를 아이들 외삼촌 집에서 보내게 된다. 한가로운 음악이 흘러나오는 엘피판이 슬렁슬렁 돌아간다. 카메라는 천천히 이동하면서 커다란 거실에서 흥겹게 이야기를 나누는 어른들을 보여준다. 다시 카메라가 오른쪽으로 (역시 천천히) 움직이면서 여기저기 흩어져 놀고 있는 아이들이 나타났다가 괴물 탈을 쓴 사람이 들어오면 다시 왼쪽으로 사람과 카메라가 이동하고, 아이들과 어른들이 서로의 허리춤을 잡고 기차놀이를 하며 지나가는 몸통이 리듬감 있게 이어진다. 정말이지 풍요로운 크리스마스이다. 정점은 화재이다. 밤에 숲에 불이 나는데, 119 같은 건 없고, 사람들이 달려 나가 양동이를 들고 물을 뿌린다. 불을 끌 목적이 있는 건 사실이겠으나, 한편에서는 노래를 부르고, 아이들이 물을 나르고, 다른 사람들이 불 끄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마치 축제 같다. 그가 무엇을 겪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름답고 낭만적인 크리스마스였음에 틀림없다. 


나는 이렇게 다른 사람의 기억과 추억을 담아둔다. 비록 내 것은 아니었으나, 영화를 통해 본 다른 사람의 기억은 나의 체험이 된다. 나는 가끔, 영화를 통해 다른 사람의 경험을 경험하고 내 기억으로 만든다. 그리고 다시 당신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다. 당신의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된 나의 새로운 기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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