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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Mar 26. 2021

24주. 멜랑콜리아(2012)

2019. 12. 21. by 감자

트위터에서 본 이야기다. 자기 언니가 우울증을 겪고 있는데 언니를 기운 나게 만드는 것이 제철음식에 대한 소박한 욕구라서 귀엽다는 글이었다. 죽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리던 언니가 겨울이니까 새콤달콤한 귤은 맛보고 죽어야지, 라며 힘을 내는 것을 보고, 화자는 계속 언니를 맛있는 것들로 꾀어야겠다고 다짐한다. 봄이 되면 달콤한 딸기 뷔페에 가고, 여름이 되면 시원한 수박을 먹자고 언니에게 속삭이겠노라고, 그렇게 한 계절, 그다음 한 계절씩 언니가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주어지면 좋겠다고. 병을 앓는 언니를 바라보는 동생의 안타까움이 슬프지만은 않게 느껴지는 일화였다. 맞아, 음식은 삶의 강력한 추동장치지,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멜랑콜리아’는 ‘뱀파이어의 인터뷰’에서부터 될성부른 신경질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내던 키얼스틴 던스트가 자신의 매력을 100% 쏟아부은 영화다. 나는 그 배우의 얼굴을 볼 때마다 희고 얇은 피부 아래에 혐오스러운 것을 보았을 때 인간이 생리적으로 짓는 경멸의 표정을 만드는 근육이 상시 꿈틀대고 있는 것 같다는 상상을 한다. ‘브링 잇 온’이나 ‘웜블던’ 같은 밝은 영화에 나왔을 때도 웃지 않는 얼굴에서는 무기질적인 차가움이 느껴지곤 했다. 그와 같은 부류의 인상을 가진 배우로 킬리언 머피가 떠오르는데, 킬리언 머피는 키얼스틴 던스트에 비하면 순둥하고 소극적으로 보일 정도다.


이 영화는 플롯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플롯이 갖추어야 할 논리성을 극도로 제한한 작품이다. 영화의 스토리는 종잡을 수 없고 거의 모든 씬들이 ‘도대체 왜 저러는 거지?’라는 의문을 갖게 만든다. 이 영화의 목표는 관객으로 하여금 아름다운 장면들 사이에서 순간순간 분출되는 우울한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그 목표는 영화 포스터에서부터 실현된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키얼스틴 던스트가 있는 대로 미간을 찌푸리고 존 밀레이의 ‘오필리아’처럼 물에 떠 있는 포스터는 그 자체로 영화의 모든 것을 알려준다. 강렬한 포스터에 사로잡힌 채 영화를 바라보게 되면,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사용한 5분 남짓 되는 도입부 시퀀스가 우울증이 갖는 비참한 아름다움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이미 그때부터 관객은 기묘한 감정적 무중력 상태에 빠져들게 된다. 우울함에 젖어들면 느끼게 되는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먹먹함이 사위를 감싼다. 웨딩드레스를 입고 도망치듯 달리는 저스틴은, 그러나 다리를 친친 감는 수초와 극도의 슬로모션 기법으로 인해 오히려 뒤로 빨려 들고 있는 듯이 보인다. 영화의 본 스토리가 등장하기 전부터 관객들은 지쳐버리는 것이다. 영화는 그렇게 기운이 다 빠진 관객들을 손아귀에 틀어쥐고 시작한다.


영화는 중증 우울증에 시달리는 저스틴(키얼스틴 던스트)과 그의 언니 클레어(샤를로트 갱스부르)의 종말을 그려낸다. 1부의 주인공인 저스틴은 고성에서 열리는 자신의 결혼식을 끝까지 마치기만을 바라나 결국 예식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파국의 이유에는 저스틴의 병도 한몫 하지만, 사실 그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저스틴의 주변인은 모두 차갑거나 겁먹은 영혼으로 그를 상대한다. 저스틴은 그 모든 것을 느낄 만큼 예민하고, 그 모든 것을 아무렇지 않게 이겨낼 만큼 강하지 못하다. 그리고 나약한 저스틴은 상당히 환멸스럽게 그려진다. 하지만 2부의 저스틴은 우울증에 완전히 함락되어 제 힘으로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임에도 아름답게 보인다. 2부의 주인공은 클레어이고, 그는 동생을 돌보면서도 지구를 향해 다가오는 행성 멜랑콜리아가 지구를 멸망시킬 거라는 두려움에 떤다. 역설적으로 지구의 종말이 다가올수록 저스틴은 힘을 얻는다. 모든 것의 소멸이야말로 우울증 환자가 가장 바라는 것이기 때문일까? 행성이 다가올수록 차분해지는 저스틴은 마지막까지 클레어와 있으며, 부드럽게 웃고 언니를 위로한다. 그리고 결국 지구는 멸망한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나는 역겨움을 느꼈다. 우울증을 아름답게 그려 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자신의 우울을 세상의 종말에 비견하는 우울증 환자의 비대한 자의식이 가소로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역겨움에는 분명 우울증에 함몰된 자아에 겹쳐지는 미적 성취가 있었다.


12월 초, 당신이 부산에 내려와 비스트와 셋이서 함께 시간을 보냈던 시간들은 참으로 꿈같았다. 같이 음악을 듣고, 피곤한 몸으로 밤늦게 고기를 먹고, 넓고 한산한 과학관을 어슬렁거리고, 완벽한 햇살의 바닷가 산책로를 걷고,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고……. 시간을 과거로 되돌린 기분이었다. 그 주말이 끝나고, 나는 오랜만에 우울했다. 일을 하며 웃는 것이 고역이었다.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우면 울었다. 상실감이 짙었다. 다시는 가질 수 없는 것, 과거의 어떤 삶의 결에 대한 향수를 앓았다. 미성숙한 자의식을 가진 성인들이 거부당할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완벽한 타인들을 서로로 여기며 천진하게 기대었던 시간들 말이다. 생존과 무관히 잉여적이었던, 사치스럽고 유일했던 시절.


처음에 이야기 한, 우울증이 있는 언니가 계절 음식으로 기운을 낸다고 했던 그 동생의 글에다가 어떤 사람이 며칠 후 이런 코멘트를 달았다. 그 언니에게 우울증을 이겨낼 수 있게 하는 힘은 계절 음식이 아니라 사실 동생이었을 거라고. 그 코멘트를 보는 순간 눈물이 뚝 떨어졌다(출근하는 지하철이었음에도 말이다!). 그들은 세상이 멸망할 때 서로를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세상이 멸망해도 그리 서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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