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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Mar 26. 2021

26주. 포드 v 페라리(2019)

2019. 12. 30. by 만정

그 사람이 이 영화를 예매했다고 했을 때, 사실 시큰둥했다. 포드가 페라리를 이긴다는 것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매출과 사세 면에서라면 이미 페라리는 망한 회사였고, 포드는 비할 바 없이 큰 회사였다. 그래도 '천박한' 미국 자본주의의 앞잡이가 저 유럽의 정신을 가뿐히 즈려밟고 출전 경험조차 없었던 지옥의 레이스, 르망 24시간 레이스에서 우승컵을 빼앗는다는 줄거리는 상상만 해도 화가 났다. 효율적인 체계로 유명한 미국 기업에서 단숨에 고성능 차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차를 타고 레이싱 하는 장면이 주구장창 이어지다가 골인! 이겼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상상만 해도 지루했다. 물론 이런 얘기를 하는데 굳이 맷 데이먼과 크리스찬 베일 같은 좋은 배우들이 필요한가 싶은 생각이 잠시 스치긴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예상은 나의 오만이고 편견이었다. 포드는 레이스에서 페라리를 이겼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포드를 승자 혹은 영웅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영화는 은근히(대놓고 인 것 같기도 하다) 포드를 "흉측한 공장"에서 공장제 대량생산 차나 만들어내는 "돼지" 같은 기업으로 폄훼한다. 이 문장에서 따옴표 쳐진 문구는, 페라리의 수장 앤초 페라리가 자기 회사를 인수하겠다는 포드 임원진에게 날린 일갈이다. 포드가 당시 근대 자본주의 시스템의 상징이라면, 페라리는 그 대척점에 있었다. 앤초 페라리는 자동차를 예술로 생각하며, 완벽을 추구한다. 모든 엔지니어는 부품 하나하나에 만전을 기하는 장인이다. 대량생산은 애초에 불가능한 체제이다. 그 바람에 회사가 재정적으로야 파산하지만, 앤초는 포드에서조차 그 이름이 거론되면 임원들이 자세를 고쳐 앉게 만들 정도로 자동차 업계에서 추앙받는 인물이다.


흥미롭게도 포드는 체계화된 대량생산 체제를 통해 페라리를 이긴 것이 아니었다. 승부욕을 불태우기 시작한 포드는 르망 24시간 레이스 우승자 출신 자동차 디자이너 셸비(맷 데이먼 역)를 찾아간다. 셸비와 그의 팀이 일하는 방식은 포드가 추구하는 것처럼 컴퓨터, 첨단 장비, 수치나 데이터와 거리가 멀다. 물론 셸비의 팀이 페라리처럼 부품 하나하나를 직접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포드처럼 시스템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일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선 숙련된 소수의 팀원이 경험에서 우러나온 노하우와 감각, 다소간의 '수작업'을 통해 우승할 차를 튜닝해 나간다. 차 내 기류 문제를 확인하자고 했을 때 포드 직원은 차에 거대한 컴퓨터를 달지만, 셸비의 엔지니어는 털실과 스카치테이프를 가져오라고 하는 식이다. 차에 털실을 달고 주행을 시작하자, 기류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곧장 모두가 눈으로 확인하게 된다. 포드의 승리는 역설적으로 페라리적인 방식의 승리였던 것이다.


포드라는 거대 조직의 관료적인 운영 방식은 심지어 셸비 팀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좋은 자동차는 르망 레이스에서 이기기 위한 충분조건일 뿐, 승리를 위해서는 특별한 레이서가 필요함을 셸비는 거듭 주지한다. 셸비가 르망 우승을 위해 선택한 레이서는 켄 마일스(크리스찬 베일). 켄 마일스는 레이서로서 완벽하지만 다소 까다롭고 괴팍한 인물로 그려진다. 포드의 ‘경영진’은 회사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그러나 사실은 사심을 보태서-끊임없이 켄을 반대한다. 레이스 전문가들의, 전문적인 식견에 의한 결정은 ‘책임자’ 혹은 ‘결정권자’에 의해 끝없이 방해받는다. 영화에는 수직적인 의사결정구조 하에서 최선의 결정이 어떻게 불가능할 수 있는지에 대한 훌륭한 묘사가 많이 등장한다.


영화의 교묘하고 오묘하며 촘촘한 시나리오는 이렇게 레이스 승부 이상의 많은 대립을 제시하면서 영화 자체를 풍성하게 만든다. ‘대량생산 v 가내수공업’의 생산체제라든가, ‘수직 v 수평’의 의사결정구조 같은 시스템의 문제 같은 대립항들 말이다. 나로서는 상반된 인물도 흥미로웠다. 말하자면, ‘강력한 설득력 v 흔들림 없는 자기주장’이랄까. 셸비와 켄은 어떤 의미에서 반대되는 성향의 캐릭터이다. 셸비는 설득왕이다. 상대를 홀리는 요사스러운 말발을 지녔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상대의 동의를 얻기 힘든 상황에서조차, 자신의 뜻을 관철시킬 수 있는 협상력을 발휘한다는 의미에서이다. 첫 번째 르망 출전에서 우승하지 못했을 때 자신을 해고하지 못하도록 설득하는 장면이나, 두 번째 르망 출전 선수로 반드시 켄을 써야 한다는 주장을 관철시킬 때, 헨리 포드 2세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만 같은 놀라운 솜씨를 보여준다. 지난가을, 휴직 직전 진행했던 프로젝트부터 협상과 설득은 내게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인데,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켄은 고집불통이다. 불독으로 불리는 이 자는, 특히 초반에, 자기주장이 너무 강한 나머지 다른 사람들과 원만하게 지내고 ‘바람직한’ 방법으로 상대와 의사소통하는 데 다소 문제가 있는 캐릭터로 묘사된다. 셸비와 켄의 '성격'은 대립각을 이루지만 두 '사람'이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신뢰하고 제법 죽이 맞는 친구이다. 셸비는 켄을 설득할 수 있고, 켄은 셸비의 의견을 따른다. 사실상 두 사람 모두 일에 있어서는 최고의 선수이며, 일에 있어서만큼은 켄 역시 냉철할 만큼 차분한 사람인 탓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상반된 두 캐릭터가 완벽한 합을 맞추는 모습은 오히려 ‘오션스 일레븐’을 떠올리게 한다.


한편, 켄은 극중 인물 가운데 유일하게 성장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고집불통에 타협을 모르는 켄은, 마침내 르망에서 완벽한 레이스, "퍼펙트 " 펼친다. 2위와 상당한 격차로 이미 우승을 확정 지은 상황에서 켄은 포드의 결정을 받아들여 속도를 늦춘다. 포드의 결정이란, 1위부터 3위까지 포드의 차량  대가 나란히 결승선을 통과하는 ‘보기 좋은 그림 만들라는 지시이다. 사장의 지시이거나 말거나 평소의  라 받아들일  없는  우스꽝스러운 결정을 켄은 수락하고 나머지  대의 포드와 함께 결승선을 통과한다. 켄은 르망에서 완벽한 레이스라는 개인적인 이상을 실현했을  아니라 타인과 조직을 생각함으로써 마침내 자신의 한계도 넘어선 것이다. 감격의 순간 밝혀지는 거대기업 포드의 꼼수는 덤이자 스포일러이다, 후훗.


2시간 30분. 내게는 르망의 24시간만큼 견디기 어려운 극장체험이다. 특히 옆 좌석에서 냄새나고 소리 나는 팝콘을 먹고 있다면 고통은 배가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긴 시간이 길지 않게 느껴졌다는 것으로 영화에 대한 칭찬을 대신하고자 한다. 레이싱 외에도 풍부한 이야기가 가득한 영화이다. 극장에 가실 일이 있다면 강력히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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