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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Mar 26. 2021

21주. 봄날은 간다(2001)

2019. 11. 25. by 감자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영화 <봄날은 간다>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기억나는 대사이다. 요즘에는 “라면 먹고 갈래?”가 플러팅을 위해 사용되면서 널리 퍼져있지만, 아무래도 이 영화를 대표하는 대사라면 이것이겠다.


이 영화를 본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친구들 네 명과 같이 영화관에 갔는데 옆 상영관에 원빈이 나오는(그리고 신하균도 나온다!) <킬러들의 수다>가 동시 상영되고 있는 거다. 뭘 보면 좋을지로 친구들과 한참 고민을 하다가 한 명을 뺀 세 명이 이 영화를 선택했다. 영화가 끝나고 넷이 함께 밥을 먹으며 혼자 <킬러들의 수다>를 보러 간 친구가 승리자라며 왁자지껄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랬다, 영화는 고등학생이 보아도 마음이 두근거리는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가졌으나 뻣뻣하고 단순한 고등학생이 받아들이기에는 좀 복잡한 정서도 함께 있었다.     


-은수는 상우를 사랑했나?

-사랑했지. 그러니까 사귀었지.

-그냥 갖고 놀았지. 꼭 좋아해야 사귀나?

-근데 이혼했으면 미리 얘기를 해야 되는 거 아니가? 좀 그렇다.

-우리 언니가 오빠랑 3년째 사귀고 있거든. 근데 언니 말로는 은수가 이해가 된다더라. 진짜 사랑을 해 본 사람은 은수를 이해하고, 아닌 사람은 상우를 이해한다데.

-오, 맞나.     


kfc에서 타워버거 세트를 우적우적 먹으며 넷이서 이런 얘기를 나누다가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갔던 18살의 가을이었다. 아무튼 이영애는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유지태는 진짜 멋있다는 심플한 결론을 내고 충만한 기분으로 버스 창밖을 내다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때보다 나이를 두 배로 먹은 36살이 되었고, 여전히 은수의 마음은 잘 모르겠다. 내게 아직도 이 영화는 이영애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유지태가 진짜 멋있는 걸로 다 한 영화다. 강원도의 소도시를 오가며 고요한 소리를 따는 두 사람은 그 자체로 너무나 아름다웠다. 화면은 짙푸른 대숲으로 가득했다가 흰 눈이 날리는 어둠에 덮였다가 은수가 맨 새빨간 목도리의 강렬한 채도에 환해지기도 했다. 상우와 은수는 숨을 죽이고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풍경 소리를 들으러 밤을 지새우고 수줍어하는 할머니들의 노래를 듣기 위해 애교를 부린다. 둘이 사랑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일을 함께 한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아름다운 일 덕분에 연인이 된 두 사람이 있다고 하면, 아름다운 일이 사라졌을 때 그 연인은 어떻게 되는 걸까. 영화에서는 상우와 은수 두 사람을 통해 단둘만 남겨진 연인의 모습을 보여 준다. 상우는 사랑을 일상에서 계속 이어가길 원하지만 은수는 전혀 그렇지 않다. 일상의 구차함에 사랑이 끼어들 공간은 없는 것이다. 상우는 은수를 만나기 위해 서울에서 택시를 타고 강릉까지 달리지만 은수는 상우에게 김치 한 포기 담가 줄 수 없다. 은수에게 사랑은 아름다운 순간이고 그것이 사라지고 나면 함께 사라져야 할 존재가 된다. 상우는 은수에게 어떻게 사랑이 변하냐고 묻지만 은수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은수와 상우가 가지고 있던 사랑의 성격이 달랐을 뿐이다. 그래서 은수는 상우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가벼운 통보를 내릴 뿐이다. 상우의 질문을 일방향의 탄식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 상우의 대사는 이렇게 표기하는 게 더 옳겠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두 사람이 결별을 하고 나서도 영화는 계속해서 감정의 페달을 밟아 나간다. 상우는 사랑을 잃고 고통스러워하고, 은수는 아무렇지 않은 듯 별 볼 일 없는 다른 남자에게 플러팅을 하며 지낸다. 그러다 은수는 어느 순간 상우를 생각한다. 나에게도 아름다운 순간이 있었음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은수가 상우를 만나러 왔을 때, 상우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은수를 거절한다. 은수는 머뭇대다 악수를 청하고 다시 뒤돌아선다. 그리고 곧 마지막 장면이다. 갈대밭에 홀로 서서 웃을 듯 말 듯 묘한 표정을 한 상우. 은수에 대한 사랑이 더 이상 괴롭고 무거운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사랑은 변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그 대사가 담고 있는 질책에 주눅이 들었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 말을 뱉은 상우조차 사랑의 가변성을 경험하고 거기에서 안도를 얻는다. 봄날은 가고, 그리고 어쩌면 다시 봄이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올해의 그 봄은 다시 오지 않는다. 그러면 어떤가. 우리에게는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있고, 그 계절들은 고스란히 부름켜에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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