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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Mar 26. 2021

14주.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나는 반대한다(2019)

2019. 10. 09. by 만정

지난 한 달하고도 2주 간 나는 마음고생을 좀 했다. 개인적으로는 회사에서 진행 중인 일이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안 그래도 무거운 마음에 돌덩이처럼 묵직하게 얹혀있었던 다른 문제는 이른바 ‘조국 사태’-올바른 명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였다. 곤혹스러웠다. 그렇지 않다고 믿고 싶은 마음을 충격에 빠뜨리는 기사들이 매일같이 쏟아졌고, 그 확인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자기 의무를 방기 했으므로 나의 괴로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나처럼 혼자서 괴로워하던 사람들은 다시 광장에 모였고, 이제 의제는 시민에 의해 검찰개혁이나 언론개혁처럼 더욱 근본적이고 중요한 문제로 넘어갔다.


이것은 한 달 반 동안 이어진 지난한 싸움 끝에 얻은 성과이자 결과이고, 이제 와 돌아보면 이 싸움은 검찰과 언론과 보수가 ‘진보주의자의 위선’을 가리키는 잡다한 의혹들을 지피는 것으로 시작되었던 것 같다. 이른바 ‘강남좌파’에 대한 고전적인 비난. 그것이 위선이었는지, 이런 비난을 받아 마땅한지에 대한 판단은 차치하고, 나는 이 비난 자체가 부당하고 답답했다. 잘 사는 사람은 진보적이지 말아야 한다는, 혹은 진보적일 수 없다는 보수의 암묵적인 경고 혹은 자칭 진보주의자들의 낡은 비판이 지루했다. 성별이나 인종, 키, 나이처럼 주어진 경제 계급적 조건 때문에 정치적인 입장을 선택할 자유를 제한받는 것이 내겐 정당해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그 근저에는, (세계가 언제나 일정한 보수의 힘을 갖고 있다는 전제 하에) 세계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것은 진보적인 이상이며 가치라는, 전혀 정교하지 않은 나의 이론이 있음을 인정한다. 근거도 없고 힘도 없는 나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데 오늘의 영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 나는 반대한다’를 바친다.


이 영화는 미국 연방 대법원의 대법관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이하 RBG)의 생애를 그린 다큐멘터리이다. 그녀는 클린턴의 지명으로, 두 번째 여성 연방 대법관이 되었다. 1990년대가 되어서야 대법관 9명 중 2명이 여성이 되었다는 뜻이다. 세계는 아직도 얼마나 남성 중심적인가. 1933년 생으로 우리 할머니보다 한 살 더 많은 그녀는, 우리 할머니가 전쟁을 겪던 시절 코넬에 입학했고, 졸업 후엔 변호사가 되기 위해 하버드 로스쿨에 진학한다. 하버드 로스쿨 정원 540명 중 여학생이 9명이던 시절이었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뉴욕 같은 곳에서조차 여성이라는 이유로 로펌에 채용되지 않던 시절 말이다. 들을 때마다 놀라는 대목이지만, 미국에서조차, 1960년대-1860년대나 1760년대가 아니다!-까지도, 여성의 권리와 지위에 대한 차별이 ‘법’에 ‘명시’되어 있었다고 한다. 미국에서 여성해방을 위한 인권운동이 시작되던 1960년대, 성차별 관련 소송들에 ‘소송 사냥꾼’으로 나선 그녀는, 이후 항소법원의 판사로서, 그다음엔 미연방 대법관으로서 성차별적 법률 폐지에 앞장서며, 오늘날 미국 여성들이 누리는 법적 지위를 쟁취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이렇게, 영화의 초점은 그녀의 생애 중에서도 특히 여성 인권에 대한 기여에 맞춰져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그녀의 성격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증언이다. 오랜 친구, 여성 인권 운동을 위해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그녀가 “과묵하고 소극적”이었다거나, “내성적이고 진지하다”라고 말한다. “전혀 잡담을 하지 않는 사람(No Small Talk)”이라는 표현도 인상적이다. 여성을 평가할 때 긍정적인 어휘는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내가 많이 들어봐서 안다). 뿐만 아니라, 통상 ‘성공한 사람’을 특징짓는 수식어와도 거리가 멀다. 하물며 통상 (공격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페미니스트의 성향이라는 것과는 어떠한가. 


그러나 바로 이 수줍고 조용한 여성이었다. 목소리를 높이는 대신, 그녀는 법정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에 법정의 언어를 사용해 '조용히' 승리했다. 전략적으로 일했고, 법조계의 정점에 올라가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화내는 대신, 정치적으로 극단적인 반대 입장에 있는 사람조차 친구로 만들었으며, 공화당 정치인까지 설득하는 사람이었다. 두 번의 암을 차례로 이겨내며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자신의 일을 끝까지 계속해나가려는 집념으로-트럼프에게 대법관 지명권을 주지 않기 위한 필사의 노력이기도 하다- PT를 받고 팔굽혀펴기를 하는 강인한 여성이었던 것이다. 내성적이고 조용하고 소심하다는 표현으로는 그녀를 설명하는 데 분명 한계가 있다. 통설이라는 것은 때로 얼마나 무의미한가. 그녀가 자신의 방식으로, 그 자신으로서 이 모든 일을 해냈다는 것에 나는 용기를 얻기도 하고, 통쾌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녀에 대해 내가 더 놀랍게 생각하는 점은 RBG가 가장 보수적인 분야 중 하나인 법조계에서, 보수적이기 쉬운 사회/조직적으로 높은 지위에 올랐으면서도, 연령으로 봐도 보수적일 가능성이 높은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진보적인 입장을 견지한다는 점이다. 그녀는 자신의 소신과 이상에 따라 여성과 소수자의 인권을 위한 싸움을 멈추지 않는다. 취임 초기 정치적으로 중도적인 입장인 것으로 알려져 있던 그녀는,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진보적인 입장으로 분류되기 시작한다. 조지 부시의 집권 시기를 지나 대법관들의 구성이 상대적으로 보수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조용하고 수줍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을 것 같은 거침없는 진보적인 반대의견과 소수의견으로부터 이 영화의 부제인 ‘나는 반대한다’가 성립된다. 그리고 여성과 유색인종과 동성애자 차별에 대한 그녀의 거침없는 반대의견에 대중은 열광했고, RBG는 여든이 넘은 나이에 미국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된다. 


나 자신에 대한 예감-즉 절대 강남에 주소를 두는 일 없이 끝내 미혼에 자녀가 없을 것이며, 언젠가 육식을 하지 않는 채식주의자가 될 것이라는 것과 같은- 가운데에는 진보계열 정당의 당원이 되리라는 것도 있다. 이는 섬광 같은 한 문장의 예언일 뿐, 정작 진보적인 삶에 대해 진지하게 숙고해본 적은 없다. 다만, 세계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건 두려움이나 공포라는 느낌 때문에 자신을 지키고 방어하고 자신이 아닌 것에 배타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보수적인 성향은 더 안전해 보이고, 더 본능적인 선택일 수는 있을지 모른다. 나는 본능에도 불구하고 이성의 작동에 따라 타인과 함께 사는 방법을 생각하고, 내가 손해 볼지 모른다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변화를 지향하는 삶이 더 그럴듯하다고 믿는다. 그것이 더 ‘힙하다’고 믿는다. 갈 길은 멀지만 단번에 될 리는 없다. 오늘도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노력을 멈추지 않고 계실 그분의 건강과 안위를 조용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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