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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Mar 25. 2021

12주. 다가오는 것들(2016)

2019. 09. 22. by 만정

열아홉 살 때 내게 가장 중대한 문제는 ‘과연 교대에 가야만 하는가?’였다. IMF를 겪고 얼마 되지 않은 때라 그랬겠지만, 지방 여고생들에게 교대나 사대를 권하는 어른들이 많았다. 나는 그런 암묵적인 분위기가 불편했다. 졸업만 하면 좋은 직장을 얻겠지만 내가 원하는 삶은 아니었다. 아무도 강요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당시에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흐름을 거슬러 오롯이 내가 원하는 결정을 내리는 데 꽤 많은 압력을 느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나는 원하는 결과를 얻었다. 대학이 결정됐을 때 이제 골치 아픈 문제는 끝났다고 후련해했지만, 곧 깨닫게 되었다. 어떤 것도 끝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 생이 끝날 때까지 400미터 허들 경기처럼 수많은 난관이, 심지어 때로는 숨 막힐 정도로 다가올 것임을, 그리고 그 문이 이제 막 열렸음을 말이다.


영화 ‘다가오는 것들’의 주인공 나탈리(이자벨 위페르 역)는 더는 다가올 것이 없을 것처럼 안정된 삶에 다가온 뜻밖의 일들을 마주하게 된다. 나탈리는 고등학교 철학교사로서, 역시 고등학교 철학교사인 남편과 함께 산다. 장성한 두 자녀는 독립했는데, 나탈리의 집처럼 작지만 건실하게 꾸려진 가정임을 알 수 있다. 불안증으로 때를 가리지 않고 전화를 걸며 나탈리에게 의지하는 어머니 문제가 쉽지는 않지만 그녀는 어머니를 사랑하며, 할 수 있는 선에서 어머니를 돌본다. 학교에서는 자신의 일을 좋아하는 철학교사로서 제자들을 애정으로 대한다. 명망 높은 철학 교과서와 총서의 편집자로서 활동 중이기도 하다. 이런 그녀에게 남편은 다른 사람이 생겼으며 그 사람과 살겠다는 소식을 전하고, 어머니는 갑작스레 돌아가시고, 출판사에서는 해고를 통보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던 제자는 가시 돋친 비판의 말을 던진다.


내가 이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는 이렇게 당혹스러울 뿐 아니라 묵직하게 다가온 인생의 허들에 대처하는 나탈리의 방식에 있다. 나탈리에게 철학은 생계의 수단을 넘어, 삶의 원리처럼 보인다. 나는 철학의 내용이나 사조 같은 것을 잘 알지 못하고, 그래서 그녀의 방식이 굳이 어떤 방식의 철학적인 결정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나탈리가 자신에게 닥쳐온 ‘시련’ 앞에서 무너지거나 절규하거나 도망치는 대신, 그 일에 대해 생각한다는 의미에서 나는 그것을 철학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남편이 떠난 뒤, 나탈리는 지적으로 충만하게 살았다는 데에서 의미를 찾고 그 일을 받아들인다. 엄마가 죽은 슬픔에 눈물 흘리며 생각하는 것은 신이 아닌 파스칼의 팡세이다. 엄마를 상실한 슬픔 끝에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애들은 품을 떠나고, 남편은 가고, 엄마도 죽고 (…) 마침내 처음으로 온전한 자유를 얻은 거야. 놀라운 일이야.” 놀라운 일이다. 그녀는 다가온 시련에 대한 사유의 결과를 밟고 앞으로 걸어 나가길 멈추지 않는다. 평범한 시련에 대처하는 이 세련된 방식은, 마치 아무런 드라마도 없다는 듯이 평범한 어조로 차분하고 아름답게 이어나가는 영상과 편집처럼 비범하다.


이 영화에서 내가 좋아하는 영화적 장치 가운데 하나는, 나탈리가 그 작고도 야무진 몸으로 종종거리며 바쁘게 걷는 리듬이다. 나탈리는 거의 동분서주에 가깝게 뛰거나 뛰듯이 걷는다. 죽어버리겠다는 어머니의 메시지를 받고 그 집으로 향할 때, 시골마을에서 전화가 안 터지는 통에 해변과 갯벌을 오가며 통화를 할 때, 남편과 헤어지느라 우울한 와중에도 어머니 상태가 안 좋다는 소식을 듣고는 요양원의 어머니를 향해 달릴 때가 그렇다. 다가오는 일도 끝이 없지만 그 끝이 올 때까지 사람도, 삶도 멈추지 않는다는 의미처럼 보여서 그 모습이 안쓰럽지 않다. 오히려 나는 그 모습으로부터 희망을 찾는다.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는 희망을, 그리고 멈추지 않으면 삶은 계속되리라는 희망을. 이 계속됨의 희망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까지 전해진다. 나탈리는 손자를 얻고, 학년이 바뀐 교실에 새로운 학생들을 두고 여전히 수업을 계속해나가고, 서로에게 상처를 줬던 제자와 만나 조금이나마 신뢰를 회복한다. 그녀는 여전히 종종걸음으로 자녀들과 함께 할 크리스마스 저녁식사 준비를 서두른다. 삶은 그렇게 계속된다.


이렇게 시종 바쁘던 그녀가 잠시 가만히 멈춰 멍하니 있거나 생각하는 몇몇 장면들은 그래서 영화의 호흡을 바꾼다. 천천히 페이드 아웃되면서 쉼표처럼 하나의 단락을 마무리하고, 보는 이에게도 잠시 생각을 권한다. 게다가 그 장면 하나하나가 무척이나 아름답다. 집으로 초대했던 제자들이 돌아가고 혼자 남은 거실에서 가만히 소파에 앉아 그들이 가져온 꽃을 바라보는 모습이 그렇다. 옛 제자를 찾아 그르노블에 갔을 때 높은 산 위에서 풍경을 바라보는 나탈리의 뒷모습을 시간을 두고 보여주는 장면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영화 씬 중 하나이다. 이 장면은 늘 그림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를 떠오르게 한다. 감독(여성이다. 올리비에 아사야즈의 연인이기도 하고)이 그 그림의 여성 버전을 화폭이 아닌 무빙 픽처로 옮겨놓고자 했던 건 아닌가 자주 생각한다. 그 후 풀밭에 아무렇게나 옆으로 누워 가져 간 책을 펼쳐 읽는 모습 역시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나이 지긋한 여배우에게서 소녀보다 더 소녀 같은 모습을 엿보는 묘한 장면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음악도 인상적인데, 실제로 세어보면 네 곡이 전부라는 데 놀라게 된다. 곧 이혼할 남편과 마지막으로 들른 부르타뉴 별장을 떠나는 길에 차창 밖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배경에 흐르는 슈베르트의 ‘물 위에서 노래함’, 제자의 차 안에서 흘러나오는 우디 거스리의 노래, 크리스마스를 앞둔 겨울 눈 덮인 산을 배경으로 하는 ‘Deep Peace’, 마지막으로 크리스마스의 밤, 마침내 영화가 나탈리의 집을 빠져나올 때 조용히 흐르는 The Fleetwood의 ‘Unchained Melody’. 모두 영화와 단단히 결합되어 있어 마치 이 영화만을 위해 제작된 음악처럼 들릴 정도이다. 어떤 곡-장면이 제일 좋다는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주기적으로 찾게 된다.


반대로 위에 언급한 부분 외에 대부분의 러닝타임 동안 음악이 전혀 없이 영화가 계속된다는 사실도 놀라움을 준다. 음악의 부재로 인한 어떤 빈자리도 느낄 수 없는데, 음악 없이도 연기와 대사, 영상만으로 감정을 제대로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탈리만큼 야무지고 단단하지 못한 나는, ‘Unchained Melody’를 흘려두고는 두려움을 물리치려 잠시 애써본다. 그리고 나를 위해 기도한다. 계속해나갈 수 있기를, 할 수 있는 용기를 잃지 않기를, 생각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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