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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Jun 05. 2021

#16 길티 플레저 : 글렌 굴드를 위한 변명

글렌 굴드의 1955년 골드베르크 변주곡

좋아하고 싶은 것과 좋아하는 것 사이에 간극이 있다. 흔한 일이다. 나는 자주 내가 되고 싶은 존재로 존재하지 못한다. 나라는 사람은 지금, 여기서 말하고 행동하고 표정 짓고 듣고 읽고 느끼는 것으로만 실재한다. 있는 그대로의 나는 마음 같지 않다. 1분 1초까지 내가 원하는 나로 사는 근사한 인생을 적어도 나는 경험한 바 없다.


먼저,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실천이 의지치에 못 미치는 경우가 있다. 애석하다. 나는 작가 김연수를 좋아하지만 좋아한다고 시원하게 말하지 못한다. 난 그가 쓴 서문과 추천사의 광신도다. 읽고 나면 어딘가 찌릿한 통증 같은 게 느껴질 정도다. 글쓰는 인간으로서 내 자아의 1할 정도는 ‘작가란 무엇인가’의 서문에 빚지고 있다. 그의 장편 ‘일곱 해의 마지막’ 서문에 “실현되지 않은 일들은 소설이 된다”는 말에서는 큰 위안을 받았다. 가능성과 잠재력을 잃어간다는 두려움과 초조함에서 반 발짝 정도 멀어질 수 있었다. 최근에는 베르너 헤어조크의 ‘얼음 속을 걷다’ 띠지를 휴지통에 넣기 직전에 거기 쓰인 훌륭한 추천사를 읽고 버리기를 포기했다. 역시나 김연수였다. 단편집 ‘사월의 미, 칠월의 솔’에 실린 동명 소설과 ‘깊은 밤, 기린의 말’, ‘일기예보의 기법’은 약간의 과장만 보태 백 번 읽었다. 한때 내가 발화하는 많은 문장 뒤에 이 소설이 있었을 것이다. 중요한 건, 그의 장편만큼은 하나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것이다. 모두 중도에 실패했다. 이 때문에 그를 좋아하(고 싶)지만 온전히 좋아하지 못한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곤 한다.


박사 진학을 포기한 이유도 비슷하다. 내게 종교가 있다면 내 전공이다. 내가 모시는 신은 이성과 합리성이며 나는 분석과 이론으로 예배하는 수도승이 되고 싶었다. 논문과 글로써 경전에 부스러기 같은 주석이라도 달기를 소망했다. 나는 문학을 하기에는 현실적이고 하드 사이언스를 하기에는 의심이 많다. 사회과학 중에서도 가장 근대적인 학문, 계몽주의의 딸이자 산업혁명의 아들인 내 전공은 문학과 과학 사이를 가른다. 혹은 둘의 한계를 넘어선다. 합리적인 동시에 그 합리성이 토대한 비합리성이라는 전제 혹은 한계까지 정확히 인지하기 때문이다(합리성의 비합리적 토대는 사회를 꿰뚫는 통찰을 응축한 말이기도 하다). 모던하고도 모던한 내 전공을 나는 늘 자랑스러워한다. 그 마음은 변할 것 같지 않다. 이 분야에서 통용되는 이야기들을 나는 정말 사랑한다. 평생을 그 이야기 속에서 그 이야기를 생산하거나 재생산하면서 살고 싶었다.


내 종교의 위대한 업적들은 ‘지적 허영’이라고 이름 붙인 서가(마음에도 없는 자조가 섞여있음을 인정한다)에 꽂혀있었다. 어느 날 나는 박사 진학을 준비하려 모아 둔 이 서가의 책들을 실제로 거의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보다 ‘이탈리아’나 ‘빌 브라이슨’, ‘음악/미술’ 칸의 책들을 더 자주 펼쳤고 더 많이 사들이고 있었다. 뼈가 저렸다. 읽지 않고 박사가 되는 건 완전히 넌센스다. 현재의 나로 가늠하자면 내가 원하는 존재가 되는 데 실격이다. 경제적 불안과 업계의 전근대적인 관습도 내 발목을 잡았지만, 결정적인 사유는 사실상 내가 경전들을 읽지 않는다는(어쩌면 못한다는) 자각이었다. 고통스러웠지만 받아들였다.


음악에서는 이자벨 파우스트가 그런 인물이다. 고백하건대 나는 그녀에 동의할 뿐 아니라 그녀를 동경한다. 그녀는 지적이다. 그의 해석과 사운드, 무대에서 자신을 성적 대상으로 소비하기를 의식적으로 거절한다는 점이 모두 좋다. 문제는 그녀의 음반을 실제로 충분히 듣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특히 자켓이 너무나 멋진 바흐 무반주 파르티타는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한 번도 끝까지 들을 수 없었다. 이 사실은 나를 슬프게 만든다.


반대로, 내 취향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좀처럼 끊을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글렌 굴드의 1955년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여기 해당한다. 길티 플레저 guilty pleasure는 정확히 이런 상황을 의미할 것이다. 아무리 떨쳐내고 싶어도 듣기를 멈출 수 없다.


나는 글렌 굴드라는 사람이 싫다. 그의 기행이 마음에 안 든다. 음악적 재능은 말할 것도 없고 동일한 연주를 재현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사실도 내 흥미를 끌지 못한다. 그가 팝스타처럼 인기인이라는 점도 탐탁치 않다. 나는 아마 글렌 굴드라는 사람과 절대 가까이 지내지 못했을 것이다. 내게만 특별히 일어났을 일 같지는 않지만. 다행히 바흐 인벤션 같은 연주들은 흥, 별로네, 하고 명쾌하게 제쳐둘 수 있었다.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1955년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라면 다르다. 머레이 페라이어도 내가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듣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페라이어의 바흐를 아무리 좋아해도, 그의 살아있는 바흐에 동의하고 아무리 많이 들어도 소용없었다. 레가토를 모르는 이 '기계적'이고 '세련되지 않은' '팝스타'의 연주에(맞다, 의도적인 폄훼다) 나는 여전히 굴복한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음반을 재생할 때마다 패배는 반복된다. 나는 그 앨범을 끝끝내 좋아한다.


처음 들은 음반이 끼치는 영향이라는 건 무시할 수가 없다. 그건 새끼 거위가 처음 본 대상과 같은 것이다. 이 음반은 내 어미 거위다. 나는 적어도 1년 동안 주에 서너 번은 이 음반을 들으며 잤다. 물론 그때는 글렌 굴드를 미워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나는 아무런 내적 갈등 없이 음반을 흡수했다. 지금은 어림없겠지만, 다음 이어질 변주곡이 시작하기도 전에 머릿속에서 음악을 재생할 수 있었다. 당연하다. 나는 다 외우고 있었으니까.


예술품을 그 자체로 감상하는 것이 가능할까? 창작자와 분리해 독립적인 대상으로서 판단해야 할 때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어려운 일인 것 같다. 내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연주자의 태도와 삶은 내 선호 체계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드러났다. 지금까지 내가 좋아한다고 밝힌 연주자, 곡들에서 엄정한 음악적 평가(그런 것이 존재하는지는 따로 생각해볼 문제지만)만 작동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한 인간의 지향과 사상에 끌려 음반을 듣는 경우가 생긴다. 글렌 굴드에게는 억울할 일이다. 그는 음악적으로 아무런 잘못이 없다.


가혹하고 뒤틀린 폄훼는 이쯤 해두는 게 좋겠다. 시니컬한 태도를 지양하는 사람답게 말하도록 하겠다. 나는 그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좋아한다. 너무 빠르고 기계적이라고 해도, 그게 틀린 연주래도 어쩔 수 없다. 시계처럼 정확한 리듬감과 질서, 기술적 탁월함에서 오는 안정감이 좋다. 모든 변주곡을 완전하게 장악하고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이 좋다. 정확한 리듬을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탱글탱글 생동감 넘치는 터치가 좋다. 만족감은 줄어드는 법이 없다. 이 연주가 나에게 영원히 패배감을 안겨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 패배감을 영원히 즐길 것이다. 완전히 다른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사랑하게 되어도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나는 완전히 상반된 것을 동시에 사랑하곤 하니까.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나를 공명하는 모든 다양한 것들을 사랑하는 방식을 나는 알고 있으니 말이다.



음악

글렌 굴드, 골드베르크 변주곡(1955) : 유튜브에서 듣기

레이먼드 카버 등, <작가란 무엇인가 1>,  다른, 2014

김연수, <사월의 미, 칠월의 솔>, 문학동네, 2013

김연수, <일곱 해의 마지막>, 문학동네, 2020

베르너 헤어조크, <얼음 속을 걷다>, 밤의책,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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