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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Jun 09. 2021

#17 나의 이상형 그녀

빌라 로보스 - 브라질풍의 바흐 5번

그녀를 만난 건 스무 살 때였다. 나는 신입생이었고 그녀는 스물두 살, 3학년이었다. 우리는 기숙사에서 만났다. 지역 기숙사였기 때문에 서로 다른 학교에 다니는 우리가 만날 수 있었다. 익숙한 집과 도시를 떠나 낯선 곳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던 때였다. 언니는 나만큼 자주 기숙사에 있었다. 기숙사와 학교만 오가던 부적응자 신입생을 언니는 아마 동생처럼 귀여워했던 것 같다. 나는 그런 그녀를 따랐고 좋아했다. 언니는 의젓한 어른이었고 똑똑했으며(서울대생다운 똑똑함이었다) 음악이나 영화 얘길 꺼내면 모르는 게 없었다(지능과 무관한 교양이었다).


어느 날 내 방에 놀러왔다 마리아 칼라스 컴필레이션 음반을 빌려간 언니는 내 마리아 칼라스와 함께 빌라-로보스의 '브라질풍의 바흐' 음반도 주었다.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 OST를 주고 싶었는데 구할 수 없었다던 말이 아직도 귀에 맴돈다. 영화는 시간이 한참 더 흐른 후에 보았다. 언니는 내가 첼로를 좋아할 거라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그 영화음악을 좋아할 줄은 또 어떻게 알았던 걸까? 그러고 보니 이 곡, 브라질풍의 바흐 5번 역시 8대의 첼로와 한 명의 소프라노로 구성된다. 우연인가? 여튼 언니는 모르는 게 없는 어른이었다. 나는 스물두 살이 되면 어른이 될 줄 알았다. 언니처럼 모르는 게 없고 사려 깊고 교양 있는 어른.


앨범을 듣는 경험은 한 곡의 노래를 듣는 것과 다른 데가 있다. 앨범이 하나의 대곡으로 채워지는 경우가 아니라면, 낱곡을 선별하고 순서를 배치하는 편집(혹은 기획)의 과정이 필연적이다. 바흐 피아노 파르티타 전곡을 녹음한다고 해도(전곡을 다 녹음할 필요도 없다) 반드시 1번부터 6번까지 순서대로 늘어놓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페라이어는 두 개 앨범을 일 년 간격으로 발매해 전곡을 완주했는데, 첫 앨범에는 2, 3, 4번이 들어있다. 확인해본 바는 없지만 곡 순서에는 연주자나 기획자의 해석, 지향이 개입하리라 짐작한다. 듣는 내 입장에서는 첫 트랙이 중요하다. 앨범의 첫인상 같은 곡이다. 앨범의 느낌을 좌우할 때도 있고 제일 좋아하는 곡이 될 때도 적지 않다.


언니가 선물한 음반 첫 곡은 당연히 5번이다. 빌라-로보스가 지휘하고 빅토리아 로스 데 앙헬레스가 노래한 버전이 실려있다. 자주 듣고 즐겼던 데 비하면 일반적인 사실에 무심했던 것 같다. 이 곡이 9개 모음곡 중 가장 대중적으로 사랑받는다는 것은 방금 알게 되었다. 빅토리아 로스 데 앙헬레스. 이  매력적인 가수의 이름을 발음해본 것도 오늘이 처음이다.


나에게 이 곡은 곧 이 연주이다. 특정 연주가 곡과 동일시되는 것이다. 그래서 라디오에서 다른 가수가 부른 이 곡을 들을 때마다 묘한 저항감과 불편함을 느끼곤 한다. 단지 이 버전이 내 어미 거위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정도로 훌륭한 연주인 것이다. 1930년대 작곡된 현대음악답게 낯선 느낌이 있지만 그 낯섦은 파편적이고 파괴적인 것이 아니라 이국적인 것이다. 제목처럼 ‘브라질풍’이라고 정의될 이국적 느낌 말이다. 약 11분 길이로, 1. 아리아와 2. 단사(아마도 영어로는 dance일 것 같다)로 구성되며 우리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매력을 맛보게 된다.


첫 트랙인 아리아는 첼로들의 피치카토로 시작한다. 곧 소프라노가 조심스럽게 들어와 가사 없는 허밍으로 귀를 사로잡는다. 보칼리제라고 하는 이 허밍은 관능적이고 에로틱하다기보다는 글래머러스하다고 나는 늘 생각한다. 어딘지 애처롭고 서글픈 구석이 있는 멜로디이지만 그을린 피부에 풍만한 육체처럼 육감적인 음색과 노래를 압도할 수는 없다.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할 리듬과 셈여림 표현이 1분 30초 동안 애간장을 녹인다. 절창이다. 뒤이어 첼로가 허밍의 멜로디를 반복하면 레치타티보 같은 노래가 시작된다. 이때 음악이 인도하는 이국적인 풍광은 내게 아마존의 열대우림으로 구체화된다. 열대우림의 습기는 소프라노의 멜로디를 작은 소리로 같이 노래하는 한 대의 첼로에서 피어오른다. 이 습한 열기 속에서 가수의 노래는 짙고 축축한 붉은색과 녹색(원색은 안될 일이다)의 약간 건조한듯한 굵은 붓터치를 남긴다. 그러고 보면 역시 정만섭 아저씨 말이 틀린 게 없다. 음반 자켓은 음반과 무관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좋은 자켓이라면 음반을 시각적으로 암시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내 음반의 원반 자켓과 내가 음악에서 받은 시각적 인상은 통하는 데가 있다.

내 음반의 원반 자켓

아리아 칸타빌레가 사람들 사이에 유명한 듯 하지만 나는 두 번째 파트인 단사도 못지않게 좋아한다. 재미로 치자면 아리아보다는 단사다. 이건 마치 열대우림에서 노래하는 새 같다고 생각하곤 한다. 덩치가 아주 크고 매력적인 새. 모차르트 오페라 마술피리의 파파게노와 파파게나가 열대에서 노래한다면 이럴지도 모른다. 물론 빅토리아 로스 데 앙할레스의 음색은 여기서도 글래머러스한 풍모를 뽐낸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흥미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정도면 ‘브라질풍’은 충분히 납득한 것 같은데 바흐는 아직 못 찾았다. 빌라 로보스는 세계의 민속음악에서도 바흐를 발견했다던데, 바흐를 찾을 귀는 훈련이 더 필요한가 보다. 나도 언젠가 여기서 바흐를 찾아내면 무척 기쁠 것이다.


언니는 어른스러운 사람이었지만, 룸메이트이던 친동생과 함께 있을 때 얼굴에 장난기 어린 웃음이 번지곤 했다. 늘 어른이었던 언니에게서 선명한 청춘의 조각을 찾아내고 나 혼자 잠시 웃는다. 나는 스물두 살 아니라 서른두 살이 되어서도 언니 같은 어른스러움을 스스로에게서 느껴본 적이 없었다. 마흔두 살이라고 그렇게 될 것 같지도 않다. 아마도 나이의 문제라기보다는 성격의 범주이리라. 그러니 그녀 역시 여전히 그 장난기 어린 표정을 간직하고 있다고 믿고 싶다. 우리는 아마 자연 소멸되는 관계였을 것이다. 흔한 일이다. 서로 싫어하지 않아도 각자의 길을 가면서 과거로 남는 사람들. 브라질풍의 바흐와 마리아 칼라스 앨범을 열 때 나는 아직도 그녀를 생각한다. 그녀에게 좋은 음반 하나 선물하는 센스와 사려 깊음이 스무 살의 내게도 있었다면 좋았을걸. 그랬다면 그녀도 좀 더 자주 나를 생각했을 텐데. 너무 진하지는 않은 아쉬움으로 그녀를 추억한다.



음악

빌라 로보스, 브라질풍의 바흐 5번, 빅토리아 로스 데 앙헬레스(소프라노) : 유튜브에서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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