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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Jun 02. 2021

#15 비발디와 폭풍우

줄리아노 카르미뇰라의 비발디 바이올린 협주곡

요즘 새 친구에 푹 빠져있다. 줄리아노 카르미뇰라 Giuliano Carmignola와 베네치아 바로크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비발디 바이올린 협주곡 앨범(2002)이다. 이번에도 주선자는 명연주 명음반. 최근 선곡표에서 몇 차례 마주쳤는데, 듣는 순간 스파크가 일었다. 나는 이 콘체르토를, 아니 음반을 좋아할 것이었다.


의외의 일이다. 물론 나는 비발디에 호감을 갖고 있다. 영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에 삽입된 만돌린 협주곡 C장조, RV 425를 정말 좋아한다. 기분이 밝고 가벼울 때 찾아 듣곤 했다. 첼로 소나타 E단조와 투 첼로는 각별하다. 한참 첼로 레슨에 열중하던 시절 연습한 곡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발디의 바이올린 곡이라면? 그건 아직 가능성의 영역에 남아 있었다. 밀슈타인과 모리니의 1962년 앨범에 수록된 비발디를 좋아하지만 비발디 바이올린 협주곡을 진지하게 들어본 적은 없었다. 고백하건대, 사계를 편견 없이 마주하게 된 것도 최근이다. 사계 봄 1악장이 착취에 가까울 정도로 지나치게 소비된 탓에 듣기도 전에 식상하다고 단정 지었던 것이다.


나는 바이올린을 즐겨 듣지 않는다. 바이올린의 까랑까랑하고 높은 음색이 종종(실토하자면 자주) 견디기 힘들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뤼미오가 나를 배신자 보듯 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끄응). 전적으로 선호와 취향의 영역, 어쩌면 생리적인 영역에 속할지도 모른다. 아무리 이자벨 파우스트의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이 명반이라 생각해도 오래 들으면 피로해진다. 파우스트의 악기 ‘잠자는 숲 속의 공주’의 캐릭터일 수도 있고 그 앨범이 목표한 사운드 엔지니어링의 결과일 수도 있다. 슬프게도 파우스트 모차르트는 한 예일 뿐이다. 음질이 그저 그런 컴퓨터나 핸드폰으로 듣는 경우가 많아서일지도 모른다. 이유를 막론하고 편식/편향은 애석한 일이다. 나는 재미의 가능성을 조금도 제한받고 싶지 않다.


그런데 이 앨범은 들을 수 있었다. 주말 내내 듣고 출퇴근길에도 재생을 반복했다. 심지어 핸드폰에 연결된 블루투스 스피커와 에어팟으로. 클래식의 섬세한 사운드를 고려해 설계 제작되었을 리 없는 이 최신 기기의 한계를 극복하고 비발디 바이올린이 내게 닿은 것이다! 이런 순간마다 나는 경이로움을 느낀다.


반복은 좋은 징조다. 내 감상 방식은 밀도가 낮다. 각 잡고 스피커에 집중하는 일은 (거의) 없다. 대신 생활 속에 흘려놓는다. 음반이나 음악을 흘려놓고 다른 일을 한다. 씻고 밥을 먹고 세탁기를 돌리고 청소를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쓴다. 그런 일을 하는 와중에 들려오는 음악이 거슬리지 않는다면 나는 같은 음악/음반을 몇 번이고 며칠이고 반복해 듣는다. 나는 그렇게 곡/앨범을 외운다. 편애하는 곡이나 악장이 생길 때도 있지만 운이 좋으면 앨범 전체가 한 곡처럼 좋다. 그러므로 일단 앨범 한 장을 무한 반복하기 시작했다면 그것은 축하할 일이다. 내 취향은 이런 방식으로 강화되고 다채로워진다.


나는 어둡고 우울한 음악은 멀리하는 경향이 있다. 기분이 즉각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때문에 슬프거나 기분이 처지는 곡은 좋아한다고 자주 들을 수 없는 고충이 있다. 단조보다 장조를 선호하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앨범에 수록된 후기 비발디 바이올린 협주곡의 단조에서 슬픔이나 우울의 정서를 감지하지 못한다. 오히려 분출하는 응축된 에너지를 느낀다. 이것이 내가 맨발로 마중 나갈 정도로 이 앨범을 환대하는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심지어 비발디의 단조는 너무나 매력적이다.


비발디 단조의 응축된 에너지는 가끔 폭우처럼 쏟아지는데, 그 매력에 젖지 않을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비발디 협주곡은 대체로 빠르게-느리게-빠르게의 3악장으로 구성된다. 폭우는 빠른 악장에서 나타나곤 한다. 이 음반 수록곡은 아니지만 비발디 사계의 여름 1, 3악장은 천둥번개가 소네트에 명시되어 있다. 나는 그 두 악장을 좋아한다. 카르미뇰라 음반에서는 B단조 RV 386의 1 ,3 악장, 특히 3악장에서 폭풍의 분위기를 느낀다. 이 곡은 현재 음반 내 최애곡이다.


비발디의 폭우를 듣다 보니 조르조네의 그림 '폭풍우'가 떠오른다. 뭐랄까, 신비한 그림이다. 실제로 보면 작은 크기에 놀라게 된다. 그 작은 그림 안에는 쉽게 이야기로 엮어내기 어려운 두 인물이 존재하고 그들의 배경에는 곧 폭우가 쏟아질 듯한 하늘이 드리워져있다. 하늘은 푸른색이 도는 회색이다. 아직 비가 내리는 것 같지는 않은데 쩍 갈라진 번개가 보인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지만 그림 속 두 인물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듯 하다. 인물도 곧 비가 내려야 할 것 같은 하늘도 정물처럼 고요하다. 설명이 어려운 데다 창작배경과 작가에 관해 알려진 사실이 적다는 메타적인 요소가 더해지면 그림의 신비로움은 극대화된다.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에서 이 그림 앞에 선 나는 폭풍 직전의 오묘한 회색빛 푸른 하늘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곧 푹우가 쏟아질 듯 하지만 아무도 비를 맞지 않을 것 같은 무해한 다이나믹. 조르조네의 그림과 비발디의 음악은 내 머릿속에 연상의 고리를 만든다.


조르조네, 폭풍우 (1504),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 소장


나를 비발디 바이올린 협주곡의 매력으로 인도해 준 카르미뇰라의 연주에 대해 언급해야만 할 것이다. 끈적하지도 과장되지도 않은 사운드가 큰 만족감을 준다. 비발디 첼로 소나타를 연습할 때 나는 이런 소리를 만들고 싶었던 게 아닐까. 명연주 명음반에서 다른 인연을 소개해주기 전까지 나는 아마 그의 비발디를 듣게 될 것이다. 음반이 절판되었다는 사실에 슬퍼진다(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외쳐본다, 유튜브 만세!). 이 앨범을 익히면 그의 사계와 두 대의 바이올린을 찾을 것이다. 그다음에는 그의 모차르트를 시도해볼 수도 있겠지. 새로 만난 친구와의 앞날에 대한 기대감으로 마음이 부풀어오른다.



음악

비발디 바이올린 협주곡, 줄리아노 카르미뇰라(바이올린) : 유튜브에서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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