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스테드 히스 공원에서 수영을

혹은 미크로네시아나 칠레에서, 아니면 실내 수영장에서라도

by 만정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에서 하루아침에 직장(영국 정보부다)에서 쫓겨난(노년이기는 하다) 주인공 스마일리의 은퇴 후 일상을 보여줄 때 여기, 런던 햄스테드 히스 공원 수영장이 등장한다. 스마일리는 야외 수영을 한다. 느린 평영이다. 얼마든지 느려도 될 것 같다. 그에게 이 자유 시간은 당혹스러운 공백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는, 현실에서도 스파이 같은 인물이지만 어둡고 가라앉은 표정으로 기억한다. 배경음악과 수영장 색감에 대한 느낌도 같다.


어젯밤 읽기 시작한 올리버 색스의 책 ‘모든 것이 그 자리에(2019)’ 첫 챕터는 수영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아주 어린 나이부터 자연스럽게 수영을 했다는, 이제는 죽어버린 이 아저씨의 기억을 훔치고 싶을 정도다. 뉴욕에서 수영을 하다 집을 산 이야기도, 미크로네시아에서 크롤을 하는 원주민들의 이야기도, 은밀한 누드 수영장을 향해 노 저어 가는 이야기도, 모두.


어제 도착한 다른 책 ‘수영하는 사람들(2019)’의 커버가 종일 잔상으로 남아 개리 올드만의 햄스테드, 올리버 색스의 미크로네시아, 뉴욕과 뒤섞인다. 아, 굿즈로 도착한 스트로크 일러스트 유리컵의 파란 시원함도 합류해야 한다.


그러고 보니 이 모든 시작은 그림책 ‘여름 안에서(2018)’인 것 같다. 독일에 거주하던 칠레인이 현실의 우울한 날씨에서 기억 속의 칠레 해변을 소환해 그림과 글을 만들어냈다. 그림책 속 노랑 빨강의 원색 덩어리들은 해가 지도록 칠레의 파란 바다에서 헤엄친다.


나도 그런 곳에 가서 몸을 담그고 수영하고 싶다. 모든 수영을 금지당한 것 같은 지금, 이스트런던의 공공 수영장이든 런던 햄스테드든 미크로네시아든 칠레 해변이든, 야외에서 수영하고 싶다. 아니 실내 수영장도 좋다. 바닷가, 물, 수영장, 수영복, 평영과 배영, 태양 혹은 낮게 가라앉은 무거운 공기. 수영하고 싶다. 누리고 싶다. 지금 허락되지 않는 것을, 너무 멀리 있는 곳을, 그리운 즐거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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