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탱크만큼사랑해

고모일기, 22/03/27

by 만정
고모는 체스랑 안맞는 거 같애

지난 구정에 루이는 체스를 시작했다. 체스에 관심이 생겼다길래 루이 아범이 20년 전 사둔 체스 세트를 꺼냈는데, 루이는 나한테 기물 하나를 잡힐 때마다 울거나 울면서 체스판을 집어던졌다. 예상을 벗어난 건 다음 단계였다. 루이는 지는 분을 못이겨 울고 불고 하면서도 다시 나를 체스판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새로운 모습이었다. 지는 게임을 다시 시도하다니. 심지어 며칠 뒤 내게 당당하게 요구했다.


고모, 체스판 사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여왕님의 권위와 위엄이 느껴지는 지시였다.


지시에 따라, 조금 늦은 일곱살 생일선물로 체스판과 어린이 체스 책을 보냈다. 고심 끝에 고른 것들이었다. 얼마나 할지는 몰라도 정성을 다해야지. 게임은 킹을 잃어야 비로소 지는건데, 열두개 기물이 사라지는 숫자를 세면서 우는 이 어린 친구에게 게임과 인생은 단판 승부가 아니라는 것도 알려주고 싶어서 새옹지마 이야기를 담은 동화책 <잃어버린 말>도 같이 넣었다. 멋진 동양화풍 그림이 그의 마음에도 들었으면.


그후로 우리는 비대면 체스를 두고 있다. 책을 입수한 루이는 얼마나 멋진 플레이를 하는지! 또 얼마나 가차없이 기물을 움직이고 내 기물을 경쾌하게 쓰러뜨리는지! 나는 상당히 감동받았다. 나 역시 올 구정에 체스를 처음 두었기 때문에, 책을 손에 넣은 후 기물의 이름과 움직임에 대한 지식을 쌓기 시작한 루이를 당해낼 수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어느 날은 내게 캐슬링을 시전하셨다! 루이 아범은 루이가 늘 체스 책을 읽고 있다고 했다. 책의 활자를 자기 지식으로 바꾸고 실전에 활용할 수 있다니. 이런 멋진 기술을 당연한 듯 선보이다니. 세상에서 제일 값진 9,600원을 썼다. 게다가 어느 덧 내가 기물 몇 개를 잡아도 더 이상 울지 않았다. 그래도 이길 수 있다는 걸 깨달은걸까? 멋진 일이었다.


어제는 영상통화하는 루이가 앞질러 두세 수를 연거푸 두길래, 규칙대로 돌아가라고, 재미가 없어 못하겠다고 하고 지켜봤다. 그랬더니, 고모한테는 체스가 안 맞는 것 같다나. 그러면서 부루마블을 하자며 자리를 떴다.


세상에. 말은 다 배운 것 같다.


역시빨리일근대!

반칙 체스의 여운은 저녁까지 이어졌다. 루이와 계속 연결된 기분을 느끼고 싶었던 나는 최근 재미있게 읽은 잔니 로다리의 동화책 <할아버지의 뒤죽박죽 이야기>를 낭독하며 책을 한장씩 넘기는 영상을 보냈다. 그랬더니,


고모내가이책일건느대


라는 카톡 답장이 오는 거 아닌가! 세상에. “읽었는데”는 어려운 맞춤법이니까 아직 틀릴 수도 있다. 처음으로 문자로 소통하는 짜릿함을 감퇴시킬 수는 없단 말이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500000₩”을 달란다. 내가 오십만원으로 뭐 할거냐고 답장하자 그가 하는 말이, “”역시빨리일근대!” 숫자 오십만원 빨리 읽어서 감탄받는 경험이 서른 아홉에 흔한 일은 아닐 것이다. 우리 루이는 정말이지 나를 가깝게(=자기 수준으로 혹은 자기 친구로) 생각하는 것 같아 어찌나 흐뭇한지.


내가얼마나힘센지알아!!!!!!!!!!!!!!!!!

그런 한편 루이에게 좀 낯선 면도 있었다. 코로나로 여차저차 해서 우린 구정 이후 만나지 못하고 영상통화만 하고 있다(한번에 50분씩.. 기쁘지 아니한가). 어제는 왠지 지루해보였는데, 카톡에서 갑자기 자기 힘자랑을 했다. 저렇게 남아같은 말은 처음 들어본다.


내 기억을 되짚어보면, 어릴 때 나는 자주 다른 사람이 되었던 것 같다. 매일 만나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 인상적인 사람, 때론 너무 싫어하는 사람까지 내 표정과 말투와 말에 들어있곤 했다. 물론 잠시 머물다 스쳐갔지만. 그 여러 사람들이 지나가고 지금의 내가 남았다. 그래도 아직 내가 새로운 주변 사람들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감각할 수 있다.


루이는 누구를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들었을까? 다음엔 어떤 사람이 루이를 스쳐갈까? 생경하고도 일시적임이 분명한 순간이었다.


탱크만큼사랑해

대화는 금세 ㅍㅍㅍㅎㅎㄹ 같은 곳으로 흘러들었다. 그래 뭐, 사연이 있겠지. 굿나잇 인사를 했는데, 빨간 하트를 한바구니 털어내는 곰 이모티콘 답장이 왔다. 그래서 나도 사랑해(하트하트하트) 라고 답장했더니, 위와 같은 답이 왔다.


탱크만큼 사랑한다는 말은 처음 들어봤다. 얼마나 강력하고 듬직하고 거대한 사랑일까. 내 보드랍고 따끈한 사랑은 어떻게 표현해주어야 할까? 보답할 궁리를 해봐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08 나는 일곱 살, 고모는 네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