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일기, 22/05/07~08
미안하다, 고모는 놀아야겠다
동생 내외가 공들여 준비한 1박 2일 용인 여행이었다. 엄마, 아빠와 함께 우리 남매가 에버랜드에 가는 건 처음이다. 두 가구의 나들이도 처음이었다. 동생은 자신이 기획한 행사가 어버이날 휴일 인파를 비롯한 각종 난관에 부딪혀 비극이 될까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다. 그러나 완전한 기우로 밝혀졌고 우리는 한점 얼룩도 없는 환상적인 주말을 함께 했다.
우선 롤러코스터파인 올케와 엄마, 나는 놀이기구 타는 데 열중했다. 나도 이때만은 루이보다 놀이기구가 우선이었다고 고백한다.
롤러코스터를 못 타는 세 남자, 루이와 루이 아범, 그리고 우리 아빠는 이 시간을 자기들 나름대로 잘 보냈으리라 간편히 짐작한다. 동물원과 곤돌라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면서 말이다. 이렇게 반 강제적으로 세 사람이 함께 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늘 생각했다. 그점에서도 흡족하긴 마찬가지였다.
음.. 다만 루이가 최고의 시간을 보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실내와 집을 좋아하는 이 사람은 점심시간 무렵부터 이미 지쳐보였고 집에 가자고 몇 번이나 주장했다. 세시까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버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숙소로 돌아온 나는 물론 루이에게 집중했다. 루이는 역시 실내에서 강하다. 내복을 입은 귀여운 어린이 시절의 루이를 나는 평생 기억하겠지.
이렇게 귀여운 사람은 사실 매일 집에서 운동에 열심인 부모와 살고 있다. 요즘 루이는 만날 때마다 운동 동작 퀴즈를 낸다. 이를테면 버피 테스트와 점핑잭, 와이드 스쿼트와 내로우 스쿼트 같은 것들 말이다. 봐도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귀여움이다.
요즘 내가 버피를 한다고 하자, 버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며 일갈한다. 예상치 못한 지적에 혼자 웃었다. 점핑잭 같은 것도 해야지, 하며 조언하는 것이다. 너무 힘들 거 같다고 하자, 사이드 엘보를 시범 보이며 이건 좀 덜 힘들 것 같은데. 하는 이 내복 어린이.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자, 내게 돌을 던지라.
할아버지 나 잘했지? 히히히
아빠에게는 할아버지로서의 로망이 있다. 장자로서 아빠 자신이 어렸을 때 할아버지와 각별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일찍 돌아가신 본인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나 기억은 옅어보인다.
그래서 손자가 태어나길 고대했고, 평소에도 손자와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겠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그래선지 루이 태몽도 아빠가 꿨다. 엄청나게 큰 잉어가 막아도 막아도 주방 창문으로 들어왔다나. 태몽 값을 챙기신건지, 루이 코는 우리 아빠 코를 똑 닮았다.
아빠의 소중한 추억 중에서도 으뜸은 할아버지에게 장기를 배운 일이었던 것 같다. 루이에게 장기를 가르치겠고마 벼르기를 7년. 드디어 기회가 왔다. 효자가 이번 여행에 장기 세트를 들고 온 것이다. 두 사람이 30분 넘게 앉아 장기를 두는 모습에 아, 우리 아빠 소원풀이 하셨구만 싶었다. 동시에 드디어 두 사람만 공유하는 놀이가 생겨서 내가 다 흐뭇했다.
다음 날 아침, 나를 연습용 허수아비 삼아-아빠는 우리 남매에게는 정작 장기를 안 가르쳤다- 지난 밤 배운 장기 실력을 선보였다. 몇 수 두더니 우리 아빠를 바라보며 말했다.
할아버지! 나 잘했지? 히히히히히
자, 그려!
한편, 루이는 갑자기 에니메이션을 만들어야 한다며 종이를 구하러 다녔다. 그리고 종이 대신 패드 그림판에 무려 21장의 그림을 그려 루이 아범을 놀라게 한다. 별이 콕콕 박힌 검은 우주에 딱지가 빨간 입구를 갖고 있는데 별을 먹는 벌레가 구멍으로 들어가는 그림이었다.
루이는 선천적으로 특별한 재주를 타고 났는데, 남에게 권하거나 시키기를 정말 잘한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남에게 지시하거나 청해서 자기 목적을 성취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 물론 내게는 대놓고 지시한다. 그런 고로, 나는 21장의 그림에 별을 그리고 딱지를 칠하고 검은 배경을 메우는 대필작가로서 대활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렇게 에니메이션을 그려야 했는지, 그 이유는 다음날 들었다.
루이: 에니메이션을 영상으로 올리면 구독료를 받을 수 있지? 영상을 올려서 구독료를 많이 받고 싶어.
나: 구독료 받으면 뭐 하려고?
루이: 구독료를 받아서 마트를 운영하고 싶어.. 마트를 운영하려면 돈이 많이 드니까 구독료가 많이 필요해.
구독료를 많이 벌면 마트 같은 건 운영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참았다. 지난 설에 그가 열심히 하던 마트 운영 게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리 루이의 첫 꿈은 과연 마트 주인인 것인가.
머리를 이만큼만 자르면 더 멋질 거 같아
여행을 마치고 늘 그렇듯 루이 아범은 나를 먼저 집앞에 내려준다. 루이는 이제 곧 나와 헤어진다는 걸 알고 고모가 제일 좋다며 입에 뽀뽀해준다. 그러더니, 내 손톱이 너무 길다며 이러면 때도 끼고 같이 노는 친구가 다칠 수 있다고 호기심 딱지에 나왔다면서 조금만 손톱을 자를 것을 당부했다. 내가 루이만 할 땐 우리 이모한테 듣던 말이다. 내가 루이에게 할 말일 줄 알았는데, 조카에게도 듣다니. 데자뷔인가.
그러더니 내 긴 머리칼 끝을 4센티 정도 가볍게 쥐고는 이 정도만 자르면 더 멋질 것 같아, 라고 했다. 정말 이렇게 말했다. 지금 생각해도 이 사람이 뜬금없이 무슨 말인가 싶은 것이, 너무 웃기고 귀엽다. 아 내 일곱살 친구. 내 보물. 내 사랑. 내 최고의 친구. 만나는 순간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다. 벌써 그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