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일기, 22/04/24
엄마아빠를 구정 후 처음 만났다. 코로나, 만만치 않았어. 비대면으로 놀던 루이와 내가 만난 것 역시 오랜만이었다. 이른 저녁 부모님이 결혼식 참석하시기 전까지 우리집에서 세 가구가 두세 시간 같이 보내는 일정이었다.
최근 태권도 배우는 데 푹 빠진 루이는 도복까지 가져와 입은 모습을 보여줬다. 머리막기, 발차기도 보여줘, 했더니 자신감이 넘친다. 나한테는 태권도 띠 색깔 순서를 읊어주며 자, 이제 외워봐, 했다. 이 사람은 모든 몸짓이 춤인데 어째서 발레가 아니라 태권도에 매료된걸까? 난 바bar 연습마저도 음악에 맞춘다는 게 너무 좋았는데. 태권도는 음악도 없는데. 요즘 이 사람에 대한 내 초미의 연구주제다.
이것도 알파카야?
한편, 내 최신작 니트를 입고 엄마에게 처음 선보이던 참이었다. 지금껏 만든 옷 중 제일 낫다, 이런 무늬는 뜨려면 복잡했겠다며 엄마와 올케가 다정한 의견을 주는 와중이었는데 루이가 말했다. 이것도 알파카야?
나는 내심 놀란 표현을 자제하며, 어 여기도 알파카가 있긴 한데, 섬유를 강하게 만들려고 코튼이랑 울로 튜브를 만들었대. 하고 답했다. 그러자, 루이는 또 아는 체를 하며, 이건 흰색이 아니네.
소름이 돋았다. 루이는 우리만의 레퍼런스reference를 참고한 것이다! 그것도 시간이 꽤 경과한!
루이가 언급한 건 재작년에 내가 입고 다니던 흰색 알파카 니트다. 내가 뜬 첫 스웨터로, 97퍼센트 알파카 실을 썼다. 따갑지 않아서 아주 즐겨 입었는데, 털이 자꾸 빠져서 같이 노는 루이 혀에 묻곤 했다. 어느 날인가는 루이가 내게 그 털복숭이 좀 벗으라고 해서 나를 웃겼다.
루이는 내게 그 흰 알파카를 입어보라고 했다. 그러더니, 이건 까슬해. 이젠 벗어, 했다.
이 부분은 좀 윤색된 것 같다(물어보고 확인한 건 아니다). 내 알파카 니트는 정전기로도 루이 신경을 많이 거슬렀는데, 정전기가 따끔한 섬유로 남은 게 아닌가 추측한다. 왜냐하면 이 실은 전혀 따갑지 않은 촉감으로 유명하고 바로 그 장점 때문에 내 마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뭐가 됐든 우리 둘이 공유한, 시간이 꽤 지난 건에 대한 이야기를 루이가 먼저 꺼내서 많이 놀랐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쌓아가고 있고 우리 관계를 특별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그 역사다. 좀, 감동적이었다. 놀랍게도, 엄마도 비슷한 에피소드를 갖게 된다.
할머니, 저 그림 생각나?
한때 루이가 심취했던 햄스터, 고양이, 개 연작 중 내게 준 그림은 아직도 우리집 거실에 붙어있다. 테이블에 앉으면 바로 시선이 닿는 자리에 있다. 정신만 차리면 언제나 루이를 떠올릴 수 있는 위치이고 다분히 의도적인 결정이었다.
바로 그 자리에 우리 엄마와 나란히 앉아있던 루이는 뜬금없이 우리 엄마에게, 할머니, 저 그림 생각나?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말은 알파카만큼이나 나를 놀라게 했다. 우리는 당연히 그 그림과 그림에 담긴 루이의 애착과 일화들을 기억한다. 원주에서 처음 이 그림을 그려낸 일, 우리 아빠가 그 그림을 청했던 일, 루이답지 않게 그 청을 거절한 일, 서울 집에 와서 같은 주제의 그림을 수십장 그린 일, 그 그림을 팔아서 고모에게 “무지엄 산인가 뭔가”를 사주려고 시도했던 일, 그러나 그 그림이 하나도 팔리지 않아 루이가 다소 상심했던 일(이 사건도 루이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 그림은 단순한 한 장의 그림 이상이다. 우리에겐 사연이 도톰하게 쌓인, 제법 할 말 많은 그림인 것이다.
나는 원주집에도 저 그림이 거실에 붙어있다고, 우리는 이 그림을 보면서 사랑하는 루이를 생각하고 기억하는 거라고 말했다. 그다지 새겨듣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나와 루이, 루이와 우리 엄마의 만남, 우리가 보낸 시간은 휘발되지 않는다. 어딘가 기억되고 쌓여서 우리의 관계를 이룬다. 우리는 관계와 역사를 가진 사이가 된다. 특별한 사이 말이다. 나는 이 사실에 과도하게 감동받는다. 그런 그림을 기억하냐고 묻는 사람이 루이였다는 것도 흥미롭다. 그 기억을 우리에게 상기시킨 주체가 루이라니. 그 역시 우리의 관계라는 것 자체에 관심과 애정을 갖는 거 아닐까?
오랜만에 손자 만난 회포를 풀게 해드리고 싶었지만 지나고보니 다른 가족 신경을 전혀 못 썼다. 전적으로 내가 노는 데 정신이 팔린 탓이었다. 루이와 체스 대신 종이 체스판과 말을 그리고 오리는데 내가 너무 심취했던 거 같다. 정신 차리고 보니 다른 가족 보기 머쓱했다. 그 사람이야 일곱살이니 그렇다 치지만 서른 아홉 먹은 나는 그렇게 처신하지 않을 수 있었을텐데. 머쓱하긴 해도 이렇게 놀고 나면 충만해진다. 즐거운 한때가 또 우리의 역사로 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