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고모는 남자야!

고모일기, 22/05/22

by 만정

일요일 오후, 동생이 루이를 데리고 집에 왔다. 동생 내외가 회사 시험공부를 하는 동안 내가 루이와 노는 컨셉이었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자마자 태권도 기술을 시전하는 루이. 발차기가 제법 그럴 듯 해졌다. 지난 번엔 흐물흐물 춤 같았는데, 유연한 다리가 제 정수리만큼 뻗는 게 신기해서 두고 보는 사이 고모 다리를 몇 번이나 걷어찼을까.


그때까지 나는 스카프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었다. 길었던 머리가 숏컷 길이로 짧아진 내 모습을 보고 놀라게 하고 싶어서였다. 마침내 스카프가 벗겨지자 루이는 좀 작은 목소리로 왜 머리를 잘랐어..? 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고모, 머리가 짧으니까 남자야! 하하하하” 하고 웃어제낀 건 그로부터 서너 시간 후, 좀 더 몸이 풀린 후였다. 물론 나는 “곧 길어져서 또 여자 될거야!” 라고 응수해주었다.


우리는 전부 직모다. 그러니까, 우리 엄마아빠와 나, 루이아범과 루이 말이다. 루이는 네살 땐가, 스포츠 머리로 짧게 자른 자기 모습을 보고 미용사에게 머리를 도로 붙이라고 한 적이 있다. 자기 미적 기준이 꽤 확고한 어린이로서, 그 이후에는 눈썹 조금 위까지 내려오는 머리길이를 유지하는 편이다. 자기 머리보다 짧은 내 머리스타일을 단순히 낯설어하는 것만은 아닌 줄 알지만, 세상에 그런 일도 일어나긴 하지 않겠는가. 어쩔 수 없는 일 말이다.


부르마블 판 위에서 체스 말로 전투 놀이를 하면서 나는 다가오는 11월에 할머니와 함께 이탈리아 여행을 간다는 계획을 말해주었다. 그래? 하는 반응에는 뭐지? 가서 안온다는건가?와 시큰둥함 둘다 섞여있는 듯 했다. 이어, 루이, 할머니와 내가 파리에서 비행기 갈아타는 꿈을 꾸었다고도 했다. 루이의 대답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는데, 내 꿈도 말해줄까? 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말해달라고 했더니만, “칼림바에 버튼이 있었는데, 누르면 내가 원하는 소리가 나왔어” 란다. 깔깔 웃으면서 너 칼림바 연주 잘하고 싶었어? 하고 물었는데 너무 쉽게 아니라는 대답을 들은 건 다소 뜻밖이었다.


태권도 만큼 루이가 푹 빠져 있는 군대놀이도 했다. 작은 방 구석에 의자로 감옥을 만들어 날 가두기도 하고 군대니까 다나까로만 끝내야 한다고 주의를 주기도 한다. 충성도 대여섯번 지시했다. 전부터 궁금하던 걸 물었다.


“루이는 군대의 뭐가 그렇게 매력적이야?”

“제복이 멋있어. 무기랑. 모자도.”


역시! 내친 김에 태권도의 매력도 물었다.


“태권도의 매력? 옷이 멋있어. 검은 띠랑. .. 아니 품띠! 검은 띠는 색이 하나밖에 없어.”


역시 자기의 미적 기준이 확고한 어린이다. 한편, 다른 이유가 아니라서 왠지 내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렇게 놀다가 갑자기 오랜만에 ‘방귀사탕’을 발견해냈다. 우리집에 있는 연유 사탕인데, 먹으면 방귀가 나오는 사탕이라며 옛날부터 우리 둘이 키득거리고 노는 소재 중 하나다. 이 방귀사탕은 이제 딱 두개가 남았고, 루이는 늘 그렇듯 하나 먹어도 되냐고 묻는다. “어, 그래. 이게 마지막인데 우리 하나씩 먹자”고 했더니 좀 오묘한 표정이 된다. 아련하달까, 해를 잠깐 가리고 지나가는 구름이 만든 그늘 같달까. 잠시 생각하더니 자기는 다음에 올 때 먹겠다며 고모만 먹으라고 한다. “그럼 고모는 안 먹어도 돼. 너 먹고 다음에 오면 또 하나 먹어”라고 하는데도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고모만 먹으라고 하고는 손을 잡고 작은 방으로 이끈다. 비밀 이야기를 하자면서 말이다. 우리는 마주앉아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루이는 어른처럼 애틋한 표정이 된다. 내 착각이었을까? 루이 얼굴에 내 얼굴을 비춰봤을 뿐인걸까? 나는 오랜만에 우리만의 이야기 놀이를 제안한다. 훌쩍 길어진 루이를 몸에 착 붙이고 “오늘은 루이와 고모가 어딜 갔을까요?” 하고 물어본다. 우리는 전투를 뉴스 중계하기도 하고 유치원에 가서 영어 수업을 한다. 간식시간 다음엔 무려 전쟁에 대한 찬반 “디베이트”도 했다.


그렇게 놀다 보니 루이의 발바닥이 까매져 있었다. 깔끔이 루이 씨가 오는데도 바닥 청소를 못한 것은 목요일 오후 방전된 탓으로 돌리겠다. 그 사실을 알려주자 당황한 루이에게 발을 씻자고 했더니 자연스럽게 욕실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자기 발을 담궜다. 그래서 난 발씻을 줄 아는 줄 알았지. 청소하는 동안 발 씻으랬더니만 고모, 물이 까매. 근데 발이 안 하얘져. 라고 말하는 게 귀엽다. 나는 어, 고모가 발씻는 것 좀 도와줘도 될까? 정중히 묻고 처음으로 루이 발을 씻어본다. 루이는 발이 참 예뻐 했더니 말없이 나를 잠깐 껴안는다. 이번엔 내가 정말로 잠시 애틋해진다.


하얀 발의 루이는 내 정전기포 걸레를 밀며 청소에 열중했다. 나나 제 아범이 하는 말에 대꾸도 않았는데, 이런 말은 했다. 고모 근데 청소기는 어딨어? 청소기는 잘 빨아들이고 좋은데 쓰지 그래?


약속한 여섯시가 왔고 루이는 아쉽다며 팔자 눈썹을 했다. 요즘은 반 정도 립서비스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그래도 듣기 좋지만 ㅎㅎㅎ 영상통화로 또 놀자고 다음을 기약하며 바이바이한다. 늘 그렇듯 뽀뽀해도 되냐고 물으면 마스크를 얼른 벗고 평평한 입술을 허락한다. 사랑한다고 말하니 화답처럼 뽀뽀가 돌아왔다.


다음엔 톰과 제리를 그려서 막대에 붙여오기로 했다. 다음에도 재미있게 놀자, 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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