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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May 08. 2022

#38 소콜로프의 유려한 슈베르트

그리고리 소콜로프, 슈베르트 즉흥곡 D.935 3악장

3주(어쩌면 3개월)를 사자에게 쫒기는 얼룩말로 살다보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상태가 된다. 더는 쫒기지 않는다고 이성이 본능을 설득하고 윽박질러도 소용없다. 흥분한 교감신경은 매일 비상상황을 선포하고 몇 주간 피는 뇌와 팔다리에만 집중된다. 상대적으로 혈액이 부족해 소화할 능력이 떨어진 위장은 음식을 거부해 식욕부진을 일으키고 살려고 뭐라도 먹으면 구토나 설사로 경고한다. 니가 지금 전력을 다 해 도망칠 때지 한가하게 음식이나 먹고 있을 때냐고 호통이라도 치는 것 같다. 과민성 대장증후군에 대한 내과의사의 친절한 설명을 나는 이렇게 이해한다.


그동안 자도 잔 게 아니고 읽어도 읽는 게 아니었다. 음악도 못들었다. 아름다운 음악 마저도 고통스러운 자극이었다.


그러다 이 음악이 들렸다. 그리고리 소콜로프Grigory Sokolov의 슈베르트 즉흥곡 D.935. 2018년 에스테라지 실황으로 정만섭 아저씨가 소개한 신보였다(명연주 명음반은 대체 얼마만에 제대로 들은건지!). 이 곡이라면 연주자를 막론하고 우선 귀기울인다. 3악장을 사랑하기 때문이다(다른 악장과는 완전히 독립적이기 때문에 반드시 3악장이라고 특정해야 한다. 사실 다른 악장에는 애정이 없다). 연주가 아닌 곡 자체를 말이다. 현재 믿고 듣는 연주는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레코딩이다. 지메르만이-특히 젊은 그라면- 오점 있는 녹음을 남길 리 없다.


소콜로프 신보에 대한 정만섭 아저씨의 설명 두 가지가 기억에 남는다. 하나는, 슈베르트 특유의 ‘즉흥곡’이라는 양식은 사실상 ‘소나타’이며, 그의 소나타는 곧 즉흥곡이라는 것이었다. 슈베르트의 피아노곡을 좋아하는 나는 약간의 해방감을 느꼈다. 엄연히 명칭이 다른 두 양식 사이의 차이점은 아무리 음악을 들어도 들어도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더는 양식 이름에 구애받지 않고 맘편히 음악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당분간은.


한편, 연주에 대한 정만섭 아저씨의 평은 한 마디로 “유려하다”였다. 이 표현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유려함이 매끄러움이라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나는 ‘매끄러운‘ 연주를 선호하지 않는다. 하지만 유려함이 ‘거슬림 없다’는 내 표현의 유의어라면? 그렇다면 나는 이 녹음을 즐겨듣게 될 것이었다. 얼마 안 남은 주의력을 청각에 집중했다.


소콜로프의 3악장은 거슬림 없었다. 지메르만에 비해 아주 약간 느린 템포 설정이지만 꾸밈음들은 상대적으로 빠르고 도드라지게 처리했다. 지메르만에 비해 음색은 덜 투명하고 해석 상 콘트라스트의 폭도 적다. 덕분에 나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느낌을 받는다. 때로 너무 투명하고 너무 강렬한 콘트라스트에서 나는 계산된 인위적인 느낌을 받고 그 순간 연주가 불편하고 지루해진다. 조성진 레코딩을 듣지 않는 이유가 바로 후자 때문이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소콜로프가 덜 인상적이라고 할 지 몰라도(가상의 의견이다) 한결 편안하고 긴장감도 덜하다.


자연스럽고 편안하다는 것이 평범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는 오랫동안 피아노라는 악기를 신뢰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으므로, 곡과 작곡가 뿐 아니라 연주자들에도 무심하긴 했으나, 이렇게 라이브가 유려한 동시대 연주자를 이제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부끄럽기까지 했다. 막 집에 도착한 CD로 들어도 처음 라디오에서 들었을 때와 다름없이 훌륭한 연주다. 라이브라고는 믿기지 않는 여유가 밑바탕에 흐른다. 유려할 뿐 아니라 편안하다. 완벽한 연주는 여전히 지메르만이라고 답하겠지만 소콜로프의 3악장을 더 자주 듣게 될지 모르겠다. 소콜로프가 유려하다면 지메르만은 수려하다. 옳고 그름이나 우열의 문제가 아니다. 상황과 기분에 따라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것, 좋은 연주가 여러 개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슈베르트 즉흥곡이 있는 2번 씨디에 수록된 6곡의 앵콜도 모두 좋다. 칭찬으로 들리지 않을 수 있겠지만, 슈베르트와 라모, 쇼팽과 드뷔시 소품이 한 가지 톤으로 들려서 좋다. 선곡도 썩 마음에 드는데 본 프로그램에 앵콜까지, 언제고 들을 수 있는 음반을 마련하게 되어서 무척 기쁘다.


조마조마할 필요 없이 유려한 슈베르트와 소품들을 즐기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음반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그리고리 소콜로프(Pf.), 슈베르트 네 개의 즉흥곡 중 D. 935, 3번 B Flat Major. Theme and 5 Variations (Live) : 유튜브에서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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