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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Jun 16. 2022

회사원이라는 모험 : 회사와 퇴사에 관한 50개의 단어

단어 3: 아저씨

나는 회사에서 만난 아저씨들을 좋아했다. 일터에서 자기 몫을 해내고야 마는 아저씨들. 자신이 해야 할 일과 해야 할 때 같이 해야 할 사람을 알고, 두루 상황을 고려해야 할 때와 일단 하고 볼 때를 판단하는 아저씨들. 과감하게, 교활하게, 때론 비겁하게, 과도하고 무거워 보이는 짐짝 같은 업무를 너끈히 해내는 아저씨들을 신뢰했다. 그들은 믿을 만한 사람들이었고 그들에게 의지하며 일할 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회사에서 안정감을 느꼈다. 아저씨들은 회사생활을 통틀어 내게 가장 흥미롭고 애정 어린 종 species이자 주제 theme였다.


이들을 지칭하려면 반드시 따옴표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아저씨’라고 말이다. 나이가 지긋한 남자 선배/동료를 일컫는 일반 명사와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이들은 결코 친절하지 않다. 입에 발린 다정한 말 같은 것도 없다. 자주 차갑고 대개 업무적이다(아마도 특히 나를 대할 때 그럴 것이다. 신중한 아저씨들이라면 열댓 살은 어린 여직원 대하기를 기꺼워하지만은 않는다고 나는 거의 확신한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 마치 경계하는 고양이처럼 조심스러운 아저씨들일수록 신뢰도는 높아진다). 대화는 형식적이다. 유머나 재치 같은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아저씨들의 대화는 오직 기능으로 존재한다. 프로토콜에 가까운 ‘사무적인’ 대화와 태도는 불쾌하게 열린 해석 가능성(다른 말로 하면 무례)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주는 최고의 보호장구였다. 나는 이 안전한 대화들의 전형성을 사랑했다. 무미건조함을 사랑했다. 순도 높은 업무로 꽉 찬 밀도 있는 말을 사랑했다. 낭비 없고 정확한 메일 속 문장들을 사랑했다.


무엇보다 나의 ‘아저씨’들은 신중했다. 말을 아꼈고 쓸데없는 말을 삼갈 줄 알았다(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미덕인지를 알기까지 나는 몇 번이나 머리를 벽에 찧고 눈물을 흘렸던가). 이 신중함 뒤에 있을 내가 알 수 없는 그들의 과거, 그들의 업무경험, 그들의 시행착오를 생각하다가 나는 그만 ‘아저씨’들을 친근하게 바라보는 무례를 범하곤 했다.


아저씨들은 “감사하다”는 말도 쉽게 허용하지 않았다. 업무상으로 합당한 사유가 없는 감사인사 뒤에는 왜 감사하죠? 라는 물음이 따라왔다. 감사조차 거저 받길 부담스러워했으며 거절할 때도 있었다. 나는 이 결벽성을 사랑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들이 견디기 어려워하는 말은 “미안하다”였다고 생각한다. 미안하다는 말은 종착역 terminal 같아서 일의 완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 역시 후배 사원들이 미안하다고 했을 때 대답할 말이 없었는데, 내가 기대한 것은 사과가 아니라 일을 완수하게 할 대안과 방법이었다. 미안하다는 말 뒤에 예외없이 이어진 아저씨들의 침묵은 나와 같은 생각(그래서 어쩌자는거지?)의 말줄임표 아니었을까? 사과는 업무에 거의 기여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예정임을 통보하는 말인데, 이런 사과를 받고 싶은 아저씨는 없으리라 장담한다. 사과는 일상적인 업무에서 매우 부적절한 어휘인 셈이다.


이렇듯 사무적으로 잘 훈련된 경험 많고 신중한 ‘아저씨’들도 아주 간혹 나를 가여워하거나 동료로 느끼는 순간들이 없지 않았다(고 나는 믿고 있다). 매우 미묘하고 간접적인 제스처, 눈빛이 지나치는 한 순간이므로 짐작만 할 따름이지만. 자신의 안위와 안전을 최우선 원칙으로 생각하는 아저씨들이 나를 옹호하거나 보호하기 위해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을 목격하는 것은 (감히 말하건대) 시스토다리 뒤로 지는 석양을 바라보는 것만큼 감동적이었다.


아저씨들이 업무적으로 나무라거나 화낼 때조차 나는 이들에게 뒤끝 있는 미움을 품은 적이 없다. 그건 그냥 일이니까. 일은 그럴 수도 있으니까. 아니, 아저씨들에게 혼나고 야단맞는 건 되려 속이 시원하고 후련했다. 수긍할만한 합리적인 지적은 업무의 영역이니까. 잘못한 일은 다시 하면 되니까. 지금 다시 할 기회가 없다면 다음에 반복하지 않으면 되니까. 나의 잘못을 바로잡아주는(나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오직 일의 완성을 위해서) 이들의 날카로운 빨간펜에 나는 곧잘 감탄했다. 아저씨들과의 업무라는 경험은 끈적임 없이 늘 보송보송했고 쿨했다.


나의 이 지극히 일방적인 ‘아저씨’ 사랑, ‘아저씨’ 예찬은 생활인(특히 사무실에 기거하는)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내 로망을 연료로 타올랐을 것이다. 그래서 현실보다 이상적일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이 인간종을 애정한다. 무엇보다 종국에는, 나 역시 그렇게 잘 훈련된 멋들어진 여자 아저씨가 되기를 아마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회사 밖 세계에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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