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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Jul 12. 2022

회사원이라는 모험 : 회사와 퇴사에 관한 50개의 단어

단어 7: 프로젝트

회사의 시간은 대개 프로젝트 단위로 흘렀다(나중에 영원을 경험하게 되지만 그건 다음 기회에).


책임님, 오랜만이예요!

이게 얼마만이지?

제주 프로젝트 끝나고 처음이니까 10년만인데요.


이런 식이다. 짧으면 3개월에서 길면 일년. 명동, 제주, 서울역, 안양, 역삼, 서소문, 여의도, 상암,… 가까우면 걸어서 출퇴근하고 멀면 비행기를 탔다. 출근지는 고객사 위치와 사정에 따라 그때그때 정해졌고 다음 행선지를 알고 일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한번은 중국 프로젝트에 가라는 걸 거절했다(그렇다. 나는 감히 거절하는 대리였다). 이때 팀장이 개인적인(공적으로는 불쾌해할 수 없는 사안이다. 프로젝트에 적임자를 배치하는 건 그녀의 이지 않은가) 불쾌함을 숨기지 않은 기억이 오래 남는다. 입사 면접 이후 품어왔던 유머러스한 촌철살인 그녀에 대한 호감은 그날 완전히 잃게 된다.


경험적으로 정의하자면, 프로젝트는 정해진 기간, 예산, 인원으로 약속된 서비스를 납품/완성하는 형식을 이르는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최근 구독료 기반의 사업이 IT계의 유행인 듯 보이지만 지난 십여년 동안 내가 종사한 기술분야에서 대부분의 회사들은 자기 회사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소유해왔다. 내 분야는 소프트웨어 납품 중심이었지만 돌아보면 하드웨어가 없었을 리 없다. 어플이케이션 단의 설계/개발자에게 익숙하지는 않지만 장비는 물리적으로 실재해야 하니까.


한편, 프로젝트에 대한 정의에서 ‘정해진’이라든가 ‘약속된’이라는 수식어를 놓고 잠시 망설인다. 논문으로 치면 주제가 제시된 정도고 내용을 몇 장, 몇 페이지로 어떤 방법론으로 쓸지, 그래서 완성하는데 얼마나 걸릴지, 그리고 비용을 얼마나 청구할지는 쓰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수주산업으로서의 IT 산업에서는 발주가 나면 제안을 하고 수주를 하는 과정을 거쳤다. 제안에 응하는 업체마다 구축 이미지와 방법론, 그에 따른 구축 기간과 인력 계획을 제시하고 결과적으로 비용을 제안하는 것이다. 그렇게 기술과 가격 협상이 끝나면 사업자가 결정되었다.


나는 시장이 얼어붙기 직전 입사했고 4개월의 신입사원 교육 끝에 참여한 첫 업무는 제안이었다. 공들인 제안서를 장인처럼 작성하던 시대의 끝물이었다. 선배들이 밤새도록 빨간펜 리뷰와 수정을 거듭하면 아름다운 수백장의 A4 용지가 책처럼 묶여나왔다. 항상 촌각을 다투어 마지막 순간까지 수정했다. 새벽에 조금 일찍 출근해 당시 본사 1층 인쇄소에서 출력이 끝난 제안서에 파지가 없는지 마지막으로 체크해 곱게 박스에 담아 배달 업무를 맡은 사원에게 건네는 일을 맡곤 했다. 돌이켜보니, 신입사원에게 귀여운 업무를 만들어 맡겼다. 내 기여는 한장이나 되었을까 싶지만 이 과정을 사랑했다. ppt 속 한 글자, 이미지 하나에 죽고 살 것처럼 매달리던 제안룸의 분위기를 사랑했다. 공공기관 대기업 참여 제한이 발효되지 않았으면 아마 제안 업무 담당 전문 부서로 일을 옮겼텐데, 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나는 두번인지 세번  참여했던 제안서를 따라  구축 프로젝트에 투입됐고, 일년 짜리로 제법 갖춰진  사이클을 경험하게 된다.


이렇게 쓰고 보면 근사한 시작이었는데, 내 회사생활은 어디서부터 잘못된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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