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콘 같은 음반이 있다. 분명 들었는데 (내 수완으로는) 도무지 찾을 수 없는 음반 말이다. 녹음이라는 기술이 생기고 LP와 카세트 테잎, CD 라는 물질에 실린 음악이 본격적으로 유통된 지 어림잡아 백년이 지난 오늘, 레코딩은 슬금슬금 비물질(물론 IT도 결국 피지컬한 공간을 점유한다. 데이터가 저장되는 DB와 데이터를 처리하는 장치인 서버는 엄연한 장치로서 공간을 점하며, 냉각을 요하는 이 장치들은 환경 오염에도 기여하는 물리적 실재다)로 형태를 바꾸는 듯 하다. 그덕분에 더 많은 음원을 접하는 혜택을 누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LP와 CD가 갖춰져 발매되는 20세기적인 전통을 나는 사랑한다. 그래도 클래식은 이 물성이 다른 장르보다 오래 힘을 쓰는 것 같긴 하나,
명반이라고 해서 절판 후 반드시 재발매 되라는 법은 없는 것 같다. 어떤 음반은 운좋게 음원을 접했으되(아, 부정할 도리 없는 IT의 축복이여!) 서지조차 찾을 수 없는 경우도 있다(물론 내 수완이 변수이겠지만서도). 이 레코딩이 그 예다.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소나타 7번은 오직 3악장, 안네로제 슈미트Annerose Schmidt 의 이 연주만을 들어왔다. 음원도 오직 한 블로그에서만 찾을 수 있어서, 알게 된 이후로는 늘 그곳에서 이 연주만 듣는다(그럴 수 밖에 없다).
나는 연주 자체와 더불어 블로그 글에 상당히 설득되었다. 정확한 리듬과 터치가 중요하며, 피아노를 부술 듯한 (남성적인) 힘이 이 정확함보다 중요하진 않을 거라는 데 동의한다. 안네로제 슈미트는 빠르지만 무너지지 않으면서 강약조절을 이어나가므로 곡 전체에 거쳐 긴장감이 멋지게 유지된다. 솔직히 모든 마디를 귀기울이게 만드는 교활한(좋은 의미로) 연주라고 늘 감탄한다(그렇다고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느낌이 드는 건 전혀 아니다. 그건 연주의 재미를 떨어뜨리는 요소이지 않은가). 3분여 동안 쾌감이 넘친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조화롭지만은 않은 전개(화성이든 리듬이든)가 추상적인 느낌을 부여할텐데, 이 정도의 근대성은 나를 매료시킨다. 전혀 이해할 수 없지만 어딘지 익숙하고 무엇보다 흥미롭다(브리튼처럼). 오히려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 번번이 나를 다시 이 곡으로 이끄는 면도 없지 않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자꾸 들여다보게 한다. 물론 흥미로운 방식으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해야 정확하겠지만.
다만, 내가 이 곡에서 느끼는 유머에는 의아함과 의혹이 깃들어 있다. 이 곡이 전쟁 3부작으로 불리는 프로코피예프의 소나타 6-8번 중 하나라고 하는데,유머라니. 블랙 유머라고 해야 하나? 유머라기보다닌 아이러니가 만들어내는 헛웃음 혹은 우스꽝스러움일까? 그도 아니라면, 수용을 불완전하게 만드는 (문화/역사적으로) 잃어버린 무언가 혹은 오해가 있는 걸까? 앞의 두 악장을 듣지 못해서 맥락이 손실된 걸까? 그 두 악장과의 연결성을 블로그에서는 강조하고 있는데, 이 음원에 접근할 수 없어 궁금증은 증폭된다. 아, 나의 유니콘이여.
내가 이 연주의 물성에 집착하는 것은 그러나, 무엇보다 앨범 자켓 때문이다. 나는 자켓사진의 50년대 머리 스타일에 사족을 못쓴다. 요즘 일부 여성 연주자들과 달리 몸을 드러내지 않는 데다, 드레스도 아닌 것 같은 흰 블라우스 차림.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는 혹은 멍하니 초점을 잃은 듯한 시선 처리. 오른쪽으로 갸우뚱 기울어진 머리통. 손에 들린 흰 종이 악보. 연주자의 밝은 톤은 검은 틀 안에서 순수함과 신비로움을 발한다. 느낌으로 말하자면,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권태로워 보인다. 기이하고 기이하다. 음악에서는 권태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클래식 앨범의 자켓으로서 매우 이례적인 사진이라고 생각한다. 구도를 포함한 사진 속 연출 전부 말이다. 음악 만큼이나 모던하고 예사롭지 않은 자켓 사진이다. 그런 자켓 속에 담긴 안네로제 슈미트의 이미지에 나는 사실 꽤 오랫동안 강박적으로 사로잡혀 있다. 나를 우음악으로 이끈 초기의 동기는 자켓이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이제 이 자켓 이미지를 보면서 그녀가 연주하는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소나타 7번 3악장을 들어보자. 간교하게 섬세한 리듬과 강약조절, 정확한 터치가 기이한 유머와 아름다움을 풍기지 않는가. 그렇게 듣고 나면 테니스라도 한판 뛴 것처럼 상쾌하고 가벼워진다. 전 악장을 이어서 들을 수 있다면 더 좋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3악장만으로 충분할지도 모른다, 지리한 폭염의 날들을 산뜻하게 보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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