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국제음악제, Il Giardino Armonico의 4월 8일 공연
통영에 왔다. 사십 살이 되어 처음 경험한 일이다. 중부지방에서 생의 대부분을 보낸데다 운전도 못하는
내가 KTX역도 공항도 없는 통영을 언감생심 꿈이나 꿨을까. 나의 친애하는 장기엔 케라스가 이 음악제에 자주 오는 줄 알면서도 한번 엄두를 못 냈던 것이다. 그런데,
감자가 통영국제음악제에서 만나자고 했다. 감자 제안에 거절하는 법을 모르는 나는 ‘어떻게’를 생각지 않고 그러마고 했다. 그렇게 긴 하루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중간 생략하고,
통영국제음악당에 도착한 건 공연 1시간 반 전인 1시 반.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깊은 에메랄드 빛 바다가 예기치 않게 나타났다. 맙소사. 이 경관에 나는 도리 없이 감탄했다.
오후 세시 공연은 실내악단 일 자르디노 아르모니코와 카운터테너 김강민이 연주하는 바로크 프로그램. 내가 공연장에 들어섰을 때 쳄발로와 하프, 콘트라베이스가 무대에 있었고 그 외 의자는 두개 뿐이었다. 그렇다면 두 대의 첼로 외 현악기는 서서 연주하는 걸까? 그랬다.
첫곡은 일 자르디노 아르모니코가 연주하는 비발디 신포니아. 바로크 시대악기 연주에 대한 관심 때문에 덥석 예매하긴 했지만 전혀 예상치 못했다, 이 정도로 근사할 줄은! 관객인 나는 지휘에 맞춰 호흡했고 상상한 소리 그대로가 청각 자극으로 입력되는 것을 확인하며 전율했다.
나는 무대에 가까운 앞자리를 선호하지만 무대보다 낮은 이곳의 객석 높이를 확인하고는 당황했다. 그런데. 오도방정이다 싶게 온몸을 움직이며 지휘하는 지휘자 양반, 그 못지 않게 온몸을 움직여가며 선 채로 연주하는 바이올린, 비올라 주자를 이 가까운 위치에서 보자 모든 불만이 흩어지는 것이었다. 자기가 연주하는 음악 때문에 미간을 모으는 첼로와 바이올린 주자 표정은 아마 나와 같을 것이었다. 나는 지휘자와 호흡이 꽤 잘 맞는 관객이었다. 청각에 집중하려 눈이 자꾸 감겼는데 그럴수록 더 무대 위 연주자들처럼 몸이 들썩였다. 민망스러웠다. 좌석이 넉넉한데도 주변 관객에게 폐가 될까 신경이 쓰였다.
이후 김강민이 등장, 헨델의 바로크 오페라를 연주했다. 좋았지만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음악을 체로 쳐 보컬을 걸러내 악기 소리만 남기고 있었다. 보컬이 나쁘다기 보다는 내가 기악연주에 지나치게 감명받은 탓일 것이다.
비발디 바이올린 협주곡 조화의 영감 중 한곡이 연주될 때 정말 아름다웠다. 비발디 식의 화사한 바이올린 음색을 이토록 완벽하게 구현하다니. 완벽. 맞다, 완벽하다. 내가 꿈꾸던 소리다. 레코딩과도 다르게 들렸다. 시대음악 레코딩은 현악기 음색을 양감 없이 날카롭게만 잡아내거나 쳄발로의 타격감을 상대적으로 두드러지게 하기 십상인데 오늘 공연장에서 소리는 부드럽고 따뜻하게,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담요처럼 내몸을 차분히 덮는 것 같았다. 분명 청각의 일인데 촉감과 무게감이 느껴졌다. 숨을 막지 않는 담요가 샤워물처럼 내 머리 위로 떨어지고 떨어졌다. 공연장에 마법(의 기술)이라도 있는걸까?
한편, 이 곡에서 네 대의 바이올린이 돌아가며 솔로를 맡았는데 은근히 네 연주자의 음색과 개성이 드러나 흥미로웠다. 저렇게 각자의 개성이 뚜렷한데도 이렇게 하모니를 이루다니. 신비로운 조화다.
이 곡과 이어지는 성악곡에서 악장일 바이올린 주자의 솔로에 단원들이 보내는 감동의 시선을 나는 전부 알아챘다. 그는 단원들에게 존경받는 악장임에 틀림 없다. 연주도 아름다웠지만, 연주 중에 눈길을 주고 받으며 서로를 독려하는 단원들의 모습이야말로 내가 사랑하는 장면이다.
우리, 그러니까 모든 연주자와 모든 관객에게 마법이 일어난 건 인터미션 전 마지막 곡인 제미니아노 자코멜리의 “메로페” 중 ‘아내여, 나를 모르는가’에서였다. 김강민의 프로그램들은 매우 강렬한 감정을 노래하는 것들이었다. 분노와 광기같은 것 말이다. 메로페는 긴 통곡 같았다. 엄마를 몇 번이나 부르며 울고 있었다. 보컬이 울면 악기도 따라 울었다. 단 한 순간, 연주자와 관객으로서 ‘우리’에게 마법이 일어났다면 분명 이때였을 것이다.
2부는 첫 곡 삼마르티니의 리코더 협주곡이 단연 압권이었다. 이 곡을 들으며 몇 번이나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야 했는지 모른다. 지휘자 조반니 안토니니가 리코더를 연주했는데 리코더가 그 화려한 바로크식 장식음을 빠르고 정확하게 모조리 소화하는 걸 목도한 지금도 믿기질 않는다. 이때 관객석을 바라보고 연주하는 조반니 안토니니의 몸짓은 지휘하는 뒷모습보다 더욱 현란했다. 그 모습을 보니 제스로 툴의 이안 앤더슨이 떠올랐다. 요란한 쇼맨십이라고 생각했던 몸짓이 실은 플룻 류의 목관악기 연주에 필연적인 어떤 자세였던 걸까?
이후 비발디의 “줄리오 체사레“ 중 두곡이 이어지는데, 이때쯤엔 거의 첼로에만 집중했다. 남자 첼로 주자는 핀 없는 첼로를 무릎 사이에 안고 있었다. 의자에 앉으며 자연스럽게 올라간 검은 바지 밑단 아래 검은 양말이 잘 감싸고 있는 발목이 정갈했다. 이곡에서 대부분의 첼로 파트는 그가 맡았는데(2명의 첼로 주자가 있었지만 대개 한 대만 연주했다) 모범생처럼 지휘자에 집중하며 연주하는 모습을 지켜봤다.눈을 감았을 땐, 도드라지지 않지만 잊을 만하면 수면 위로 올라오는 그의 소리에 귀기울였다. 주선율 뒤에 흐르는 첼로 소리에 집중하면 꽤 다른 음악을 듣게 된다.
앵콜곡은 저 유명한 헨델의 ‘울게 하소서‘. 유명해서 뻔한 곡이라 생각했고 기대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놀라야 했다. 지금까지 화려하고 화사한 소리를 만들어내던 현악 파트 소리가 완전히 바뀐 것이다. 수수하고 담백한 사운드. 오늘 연주한 버전은 장식음마저 거의 배제한 듯 했고, 음색도 그에 맞게 먹먹하고 어두웠는데 그 무광의 현악기 소리가 특별하게 마음에 남는다.
이렇게나 좋았기 때문에 이 연주자들과 헤어지는 게 무척 아쉬웠다. 나는 마지막까지 박수를 치다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수가 멈춘 후 퇴장 중이던 연주자들이 무대를 향해 손을 흔들었고 나 역시 손을 흔들어 그들에게 인사했다.
만나서 즐거웠어요! 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