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만정 Apr 11. 2021

01. 나는 합창단원이(었)다.

'Lollipop', Chordettes, 1958

아무래도 합창단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신선한 첫 문장은 아니지만, 나도 어쩔 수 없다. 당신도 이해하리라 믿는다.


내가 합창단에 들어간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지금도 좀처럼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나는 오케스트라나 클래식기타 동아리에 지원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2003년 봄, 거기, ‘그들’이 있었다. 70년대 대학생들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건전해 보이는 한 무리의 청년들 말이다. 당시 나를 데리고 다니던(?) 친구는 마침 그 청년들의 단체에 지원하고 오디션을 보기로 했다. 얼결에 나도 그렇게 했다. 지금 보니, 내 인생의 굵직한 결정들(합창단과 회사)은 친구 따라 강남 가는 식으로 이루어진 게 분명해진다. 궁금할까봐 말해주자면, 오디션에서는 ‘봄이 오면’을 불렀다. 그래, 바로 그 가곡.


자주 얘기하지만, 몇 년 전부터는 기억력에 썩 자신이 없다. 나는 인디아나 존스처럼 협곡 사이에 놓인 허술한 나무다리를 건너는데, 내가 걸음을 떼면 나무다리는 곧 무너져 내린다. 내 기억력은 마치 이 나무다리와 같다. 나무다리가 중요한 건 아니지만, 내 기억이 불완전하거나 때로 완전히 새로운 것을 창조해낼지도 모른다. 정정해주는 것도, 보아 넘겨주는 것도 모두 환영이다.


기억력 타령을 한 이유는 이 곡, Lollipop이 내게는 합창단과 관련된 가장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는 순간, 고구마 줄기처럼 여러 곡들이 줄줄이 올라와 서로 자기가 최고라며 소리 높여 노래하기 시작했다. 맙소사. 여하간 내 기억으로는 우리가 신입생 때 신입생 음악회 전체 합창곡으로 이 곡을 불렀다. J 오빠가 고르고 지휘했을 것이다. J 오빠의 선곡은 대체로 나와 코드가 맞았던 것 같다. 처음부터 이 노래가 좋았다.


나는 천생 알토이다. 멜로디를 부르는 즐거움을 모르지 않지만, 화려한 소프라노의 주선율과 마음씨 좋은 베이스 사이에서 음을 풍성하게 만드는 역할에 딱히 불만도 없다. 아니 오히려 드러나지 않아도 되어서 마음이 편했다. 그렇게 드러나지 않는 존재함은 나와 잘 어울린다. 그런 한편, 누구나 아는 노래를 대부분은 전혀 모르는 노래로 부를 수 있다는 사실에 남몰래 우쭐하기도 했다. 마치 세상의 비밀을 나만 아는 것 같았다. 화음을 맞추느라 기묘한 멜로디 라인을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걸 어떻게 부르냐며 서로 키득거리다가 마침내 해냈을 때 쾌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난 끝내 못 익혀서 립싱크를 많이 하긴 했다). 우리는... 조금 그렇지 않은가? 라고 슬며시 당신을 끌어들여본다.


Lollipop은 짧은 아카펠라 곡으로, 드물게 알토가 주선율을 불렀다고 기억한다(내 귀에만 그렇게 들렸을지도...). 박수로 시작하는데, 그 박수는 어떤 파트가 시작했더라? 딴 단따 단 단따 단따단따단따단따 하고 박수로 선창을 하면 한 파트씩 합세해 네 파트가 다 모인다. 그다음에는 랄리팝 랄리팝 오 랄리랄리랄리 하며 역시 네 파트가 순서대로 들어온다. 마침내 네 파트가 모여 랄리팝!을 이루면 (아마도 베이스가) 둠 두둠 둠둠 하고 다시 랄리팝의 도돌이표로 돌아갔을 것이었다. 코데츠 언니들이 완벽한 화음으로 조화롭게 불렀다면 스무 살 봄의 우리들은 좀 신이 나서 불렀던 것 같다. ‘텔 유 와아이’ 같은 부분을 좀 과장해 가면서 말이다. 지금 생각해도 발랄하기 그지없는 곡이다.


유실된 기억 속에서 이제 그 밤이 어떤 밤이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신입생 음악회가 끝난 밤이었는지, 정기 음악회가 끝난 밤이었을지, 아니면 그 중간 어디쯤 정기연습이 끝난 후였던가? 그도 아니면 그다음 해? 운동장 옆길을 따라 걷던 스무 살 또는 스물한 살의 우리들은 달빛 아래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술 취한 사람들처럼 랄리팝을 불러댔다. 노래처럼 발랄하고 단순한 기억이다. 명료한 기쁨이 나부대는 것이다. 그 기쁨은 이 노래처럼 짧은 순간이기도 하다.


앞으로 쓸 글들에서 나는 혼자 흥얼거린 노래를 많이 말하게 될 것이다. 노래는 자주 삶의 위안이 된다. 간단하게 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 손쉬운 위안 말이다. 다만 몇 소절이면 되는 일이다.


같이 부르는 노래는 좀 다른 힘을 지닌다. 내 미약한 소리, 끝내 좋은 발성을 익히지 못한 작고 불완전한 소리는 계단식 강의실 뒷자리에서 들려오는 알토 친구들과 언니들의 안정적이고 믿음직한 소리에 이끌려 앞으로 나아간다. 우리가 낸 소리는 그 뒤에서 들려오는 늘 박자가 좀 둔탁한 베이스와 합쳐졌을 것이다. 여름 내 땀을 흘리며 연습을 한 다음 무대에 섰을 때에는 서로의 소리에 귀기울여가며 멜로디를 크게 부르고 화음은 조심스럽게 맞춰나갔을 것이다.


합창은 수적인 우세가 주는 원초적인 힘을 느끼게 한다. 내가 그 무리에 속함으로써 나 이상의 소리를 만들 수 있다는 깨달음이 주는 놀라움은 공동체 울렁증이 있는 내게 통하는 거의 유일한 집합적 주문이다. 이제 우리가 더 이상 같이 노래하지는 않지만, 함께 했던 합창의 기억을 떠올리고, 떠올려서 서로 의지할 수 있는 굳건한 기억으로 다질 수는 있을 것이다. 우리의 합창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00. 시작을 여는 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