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간 키운 스타트업을 매각하고 뒤돌아보며 깨달은 것들
대학생 창업이었다. 배낭 여행을 하며 겪었던 경험에서 출발한 창업은 올해로 햇수로 9년차, 기간으로 8년이 되었다. 시간에 비해 규모는 작았지만 정말 감사하게도 좋은 인수처를 만나 올 초에 회사를 매각하는 작은 엑시트를 할 수 있었다.
창업가 열에 아홉은 폐업 후 잠적 또는 큰 빚을 안고 그 빚을 갚아나가기 위해 창업을 했을 때보다 더 바쁜 온갖 일을 하게 되기에 사실 첫번째 창업에서 이 정도로라도 마무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무척이나 감사한 끝맺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반의 엑시트한 창업가들과 나를 같은 선에서 볼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잘 인지하고 있다. 보통 엑시트라고 하면 경제적 걱정없이 3대가 평생을 놀아도 되는 보상을 받는 것을 얘기하는데, 나의 경우는 그런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 1-2년 정도, 얇게 쓰면 2-3년 정도를 쉬었다 갈 수 있는 정도에 불과했다.
결국 나는 그 쉬는 시간 동안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약 7개월 정도를 휴식기를 내며 정리한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여러 길들 가운데, 나는 어떠한 형태로든(창업일 수도, 창업이 아닌 주인 의식을 가지고 나아가는 피고용인일 수도) 창업가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나의 방향성이겠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의 창업을 하나 하나 뜯어보는 복기의 시간을 가지며, 다시 창업을 한다면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5가지 원칙을 정리하게 되었다.
내가 배민처럼, 마켓컬리처럼, 쏘카처럼, 스타일난다처럼 회사를 키우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원인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첫번째 요인은 시장의 크기였다.
시장의 크기가 작으면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한계가 있다. 성장하는 속도도 결코 빠르게 구현될 수도 없고. 작은 시장을 독점해 버리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을 해왔었지만, 유니콘이 된 기업들 가운데 그런 경우는 찾아볼래야 찾아지지가 않았다.(처음에야 그렇게 보이지만 그건 1차 시장일 뿐, 사실은 애초부터 2차, 3차 큰 시장을 염두해 두고 있고, 그게 보통 시장 규모를 얘기할 떄의 시장이다.)
대부분의 유니콘들과 대규모 엑시트 사례들은 작은 시장의 독점이 아닌 큰 시장에서 두자리 수의 시장 점유율을 가진 모습을 하고 있다.
극도로 지배적인 위상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네이버도 디지털 광고 시장을 기준으로 보면 10조 시장에서 고작 2-30%의 점유율을 가질 뿐이다. 스타일난다는 한국 패션 시장 기준으로는 약 5% 정도, 중국 화장품 시장 기준으로는 1% 점유율에도 못미친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시장이 커야 할만한 큰 판일까? 개인적으로 그 험난한 길을 개고생하며 나아간 길의 끝에서 받는 (두번 다시 창업 못할 것 같아도 될)보상은 적어도 100억원은 되어야 한다고 본다.
대표의 지분은 후속 투자들을 거치며 약 20% 정도대로 희석이 될 것이고, 주식 양도에 따른 세금은 약 30%정도인데, 부수적으로 들어갈 다른 비용들 다 고려해서 아주 넉넉하게 50%라고 쳐보면, 20%의 지분이 200억의 가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럼 회사 가치는 1,000억원 정도고, 회사 가치가 보수적으로 매출과 1:1로 매칭되었다고 치면 매출이 최소 1,000억원은 되어야 한다. 그럼 두자릿 수 중에 가장 작은 10%를 기준으로, 시장 규모가 최소한 1조는 되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렇다. 그래서 내가 다음에 선택할 창업의 판이 있다면 나는, 10조의 시장 규모를 가지고 있거나, 최소 1조원은 되는 시장으로, 시장 규모가 성장해 가는 양상에 있는 판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일반적인 차원에서의 똑똑함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산업마다 특징들은 다 다르겠지만 그래도 사업이라고 하는 것은 산업을 뛰어넘는 공통된 속성이 있어서 그것을 잘 아는 것이 핵심이겠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이는 VC에 더 적합한 능력이라고 생각되었다. 매번 다른 산업의 다른 아이템을 검토해야 하는 VC로서는 빠르게 새로운 분야를 공부해야 할 필요는 있겠지만 그 지식의 정도가 창업가 수준에 이르기에는 역부족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산업간의 공통된 속성을 잘 파악하고 이를 산업별로 적용시킬 때의 변주에 익숙해 지는 것은 창업가 보다는 VC의 핵심 역량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반면, 창업가는 그 분야에 정통해야 한다. 사업은 아무리 준비해도 흔들림의 연속이고 계획은 계속 바뀔텐데, 그럼에도 불변하며 나를 잡아줄, 사업의 근간이 되는 것은 그 산업의 본질에 대한 통찰일 수 밖에 없다. 더 나아가, 이제는 대충의 지식들과 애매한 표현들로 소비자를 속일 수 없다.
극도로 똑똑한 소비자를 상대해서 결제를 받아야 하는데, 이때 나의 지식 수준이 그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금세 밑천이 드러나고 소비자에게서 외면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공모전이나 지원 사업을 통해 소소한 자금들을 수혈받은 적은 있지만, 우리는 한번도 투자를 받아본 적이 없다. 투자를 생각해 본적이 없는 것은 아니고, 간단한 자문을 구해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찾아다니지 않았다.
그 이유는 빚에 대한 막연한 공포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투자를 받고 사업이 망한다고 해서 상환 의무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체면을 중시하는 성향이 있어서인지, 혹시라도 나중에 못 갚으면 어떡하지? 배신감, 실망감을 주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이 너무나 컸다. 그래서 우린 번 만큼만 쓰고, 쓴 만큼만 나아갔다. 심지어 대출도 사업한지 5년이 넘어서야 처음으로 받아봤다.
하지만 사업에는 필연적으로 쭉 뻗어 나아가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 타이밍의 문제일 수도 있고, 오히려 어떻게든 성장해 내는 것이 규모의 경제를 바탕으로 원가 구조를 개선해서 재무 구조가 좋아지는 효과를 만들기도 한다.
MOQ에만 생산량을 맞출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주문 수량을 높임으로써 가격 경쟁력을 확보해서, 그로써 시장에서 효과적인 제품 제안을 만들어 내고 매출과 영업 이익을 견인해 내는 단순한 예를 생각해보면 쉽다.
의도된 적자 라는 말이 항상 모든 재무적 부족을 덮어주는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의견들이 있지만, 사실 이 말은 매출이 없이 적자만 내고 있는 경우가 가장 문제가 된다는 것이 핵심 의미이지, 적자가 나서는 절대 안된다는 것은 아니다. (사업하면서 어떻게 매일, 매주, 매월, 매년 적자가 안날 수가 있나!)
나는 이런 사업의 생리, 현금 흐름의 자연스러움?을 받아들이고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 순간, 나아가야만 한다고 믿는 순간에는 그러한 확신을 바탕으로 빚을 지기를 두려워 하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 회사는 그만한 재정적 여유가 없어."
"우리 회사는 그 정도의 네임 벨류가 없어."
함께 일하는 동료, 직원을 구할 때 내 스스로 항상 했던 말이다. 돈도 이름도 없어서 그만큼 좋은 인재를 데려올 수 없으니, 우리에 맞는 사람들을 찾는 데에 만족하자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두번째 창업에서는 그러지 않을 생각이다. 큰 시장에서의 큰 그림, 그리고 그에 대한 계산된 강렬한 자신감, 이를 뒷받침하는 작지만 힘있는 레코드(파일럿 테스트 결과든 뭐든)가 있다면, 귀한 인재는 반드시 모실 수 있다. 그리고 역량있는 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2-3사람을 압도하는 성과를 만들어 낸다.
급하다고, 돈이 없다고 핑계대고 체념적 채용을 습관화하지 말자.
회사 매각 딜에 도장을 찍었을 때, 8년의 시간을 정리할 때의 나의 상태는 완전히 바닥이었다. 생애 한번도 찍어보지 못한 몸무게를 찍었고, 복부 비만이나 기초 체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휘몰아치는 스트레스 덕분에 탈모는 더 심해져만 갔다.
번아웃은 어쩌다 가끔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찾아올 정도가 되었고 그러면서 정서적으로도 문제가 심각해졌다. 작은 일에도 화를 참지 못하거나 지나치게 격렬해 지는 등 분노 조절 장애를 겪고 있었고, 극도로 날카워진 태도는 아내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잦은 문제를 빚어내고 있었다. 매각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이대로 가다간 완전 망가지겠다는 걱정도 하나의 이유였다.
100억을 벌어도, 1000억을 벌어도, 내가 원한 사회 가치 변화를 만들어 내도, 내가 망가진 사람이 된다면 그게 무슨 의미일까.(부자가 되었지만 남은 생을 대머리로 살아야 한다면....슬프다. 너무 슬프다.)
창업을 하면서 아주 건강한 상태로 살아갈 수는 없다. 창업가의 정신 질병 보유율이나 겪는 정도 등에 대한 연구들을 보면, 창업은 필연적으로 건강을 해친다. 가장 건강한 상태는 스타트업을 운영하고 있는 중일 수는 절대 없다. 주 100시간을 일하기에도 바쁜데 많은 시간을 건강에 쏟을 수도 없다.
그렇기에 5번째 원칙에 대한 나의 대답은, 최고의 건강이 아닌, 극도로 부족하고 제한된 시간이나마 가장 효과성 좋은 휴식법을 찾아 활용하는 것이다. 사실 회사를 매각하고 지난 몇개월간 운동과 식이, 수면 등을 꼼꼼히 챙기고, 심리 상담도 받으면서, 관련 논문들과 책, 방송들을 찾아보고 이에 대한 자료를 가이드 문서처럼 만들었다.
단순히 유행을 탄다거나, 좋아 보인다거나 하는 것들이 아닌, 과학적으로, 객관적으로 검증된 휴식법들을 따르는 것이 핵심이다. 그래야 5년 뒤에도 10년 뒤에도 이게 좋은게 맞나? 하는 불안감이나 의구심없이 확신을 가지고 계속 이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그래야 창업에만 매진할 수 있다.
이렇게 원칙들을 정리해 보았는데, 여전히 생각나는 중요한 다른 원칙들도 많이 떠오른다.(핵심 지표에 집중하라거나) 하지만 원칙은 많아지면 잊혀지기 쉬워 원칙이 아니게 된다는 생각으로 5개에서 잘랐다.
3원칙이든, 5원칙이든, 10원칙이든, 다 자기만의 원칙을 가지고 이 험난한 세계에서 잘 살아남아 성공하는 스타트업 창업가들이 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