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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데이수 May 01. 2018

영화가 시작되는 공간, 지브리 미술관

'손 대지 마시오'가 아닌 ‘손 대 보시오'. 체험형 전시를 즐기다.

이 곳에 살러 오기 전에도 몇 번이나 여행을 온 적이 있다. 그때마다 지브리 미술관에 꼭 가보고 싶었지만 한 번도 못 가봤다. 일본 사람들도 큰 맘 먹고 티켓 오픈 당일에 편의점(티켓 판매창구)에서 줄 서 있을 정도로 티켓 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매월 10일 오전 10시에 다음 달 티켓을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동시 발매를 하고, 구입시에 입장일과 입장시간을 미리 지정해야 한다. 한 치 앞날도 내다보기 어려운데 다음 달 계획을 미리 세워 예매해야 하다니. 예약의 나라 일본답다. 어쨌든 궁금했던 곳이라 토요일 아침부터 잠옷 바람으로 편의점에 줄을 서서 티켓을 구매하면서도, 그래 얼마나 대단한지 한 번 보자 라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나, 지브리 영화를 좋아했던가? <모노노케 히메(원령공주)> <이웃집 토토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 유명한 몇 개 작품을 봤던 기억은 있지만 같은 작품을 몇 번 반복해서 보거나, 신작 나오면 챙겨 볼 정도로 팬은 아닌데. 괜히 갔다가 재미없으면 어쩌지. 이런저런 생각 끝에 드디어 관람일이 다가왔다.



미술관까지 가는 길부터가 상쾌하다. 지브리 미술관은 시부야에서 지하철로 1시간 정도 거리의 미타카시(三鷹市)에 있다. 정확히 말하면 이노카시라 공원(井の頭公園) 내부인데, 공원 안에 커다란 호수와 동물원, 지브리 미술관 등 여러 시설이 듬성듬성 흩어져있다. 그만큼 규모가 큰 공원이다. 공원 내부를 통해 가면 맑은 호수를 중심으로 청량하게 뻗어있는 나무들을 구경할 수 있고, 바깥쪽으로 돌아가면 동화에 나올 것 같은 파스텔톤의 키 작은 단독주택들을 구경할 수 있다. 어느쪽으로 가나 즐거운 경험이다.




이제 드디어 지브리 미술관. 이 곳은 어떤 장소일까?

먼저, 직접 디자인을 도맡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코멘트를 보자.


지브리 작품을 단순히 진열해놓은, '추억 박물관'을 만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 미술관에 들어가면 금방 알 수 있다. 미술관은 옥상과 정원이 있는 3층 건물로, 중앙에서 건물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올 정도 크기다. 별로 크지 않다. 정해진 관람순서가 없다는 점이 특징이다. 자기 취향에 따라 1층에서 3층으로 가도 되고, 반대로도 갈 수 있다. 각 층을 좌우 전시공간으로 나눠 각각 나름의 테마로 방을 꾸며놓았고, 어느 테마를 먼저 봐야 한다든지 하는 규칙이 전혀 없다.


내부 전시물도 특이하다. 보통 미술관에서는 '손 대지 마시오'라는 암묵적인(때로는 명시적인) 룰을 지켜야 하는데, 이 곳에서는 모두가 손을 사용해서 열어보고 돌려보고 촉감을 느껴야 한다. 눈높이도 제멋대로다. 어떤 전시물은 발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굽혀 얼굴을 가까이 대고 들여보아야만 제대로 볼 수 있다.



내가 특히 재미있게 관람한 섹션인 '영화가 태어나는 장소'. 한 편의 애니메이션 영화가 탄생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생각보다 너저분하다. 정확히는 애니메이터의 방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서재에는 구겨진 스케치북 더미와 몽당연필이 가득하다. 어디까지가 전시물이고 어디부터는 아닌지도 모호하다. 만져보면 몽당연필은 진짜 몽당연필이고, 구겨진 스케치북 사이로 슬쩍 들여다보면 정말 그리다 만 그림이 있다.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커다랗게 X자를 그어놓기도 했다. 벽면에는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설명해놓았고, 관람객들은 마치 친구네 집에 놀러온 것처럼 (너무 실례가 되지 않는 선에서는) 뭐든지 할 수 있다.


사실 애니메이션에 대해 전시하면서 애니메이터 이야기를 하는 건, 액자 안 세상을 보러 온 사람에게 액자 밖 세상을 보여주는 것처럼, 조금은 뜬금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 속 세계가 실재한다고 강요해도 모자랄 판에 영화 밖 영화를 만드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다니. 하지만 이 섹션의 전시를 다 보고 나면 뭐랄까,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머리를 싸매고 똑같은 그림을 수백장이나 그려내고 있는 애니메이터와 조금은 가까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사람의 마음이 느껴진다고 할까. 이만큼이나 치열하게, 관람객들에게 '그 한 컷'을 전달하기 위해 마음을 다하고 있다. 뭐 이런 것이다.



그 주기가 그렇게 짧지는 않지만, 어쨌든 매번 같은 콘텐츠만 전시되어 있는 건 아니다. 작년 5월부터 올해 11월까지는 '식(食)을 그리다'라는 제목으로 섹션 하나를 기획전시로 꾸며놓았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유명한 먹방 씬. 계란과 베이컨을 어찌나 맛깔나게 구워 먹던지. 이 레시피를 그대로 따라했다고 주장하는 블로그/유튜브 영상이 한가득이다. 그런데 이거 말고도 또 있던가. 처음에는 조금 의아했는데, 전시를 다 보고 나니까 고개가 끄덕여진다.



사람에게도,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에게도 먹는다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다. 먹는 장면만 편집해서 전시를 해 놓으니 왠지 조금 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맞아. 저 장면에서 맛있게 먹더라. 또는 저 장면에서 울면서 오니기리를 먹는데 참 마음이 아팠어. 이런 식. 단순히 장면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음식의 특징을 어떻게 살렸는지를 보여주기도 하고, 아예 영화 속 부엌을 세트로 만들어 관람객이 자유롭게 들어가서 아궁이도 뒤적여보고 찬장도 열어볼 수 있게 해 놓았다.


나는 이 부엌 모형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 "설마 여기까지 신경 썼겠어?"라는 곳까지 세심하게 만들어 놓아서 놀랐다. 보이는 곳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도 완벽하다. 모든 서랍을 다 열어볼 수 있는데, 서랍을 열면 조리기구를 모아놓은 칸도 있고, 좀 넓은 칸에는 부엌의 동선을 감안해서 상온보관해도 되는 양파나 감자가 들어있기도 하고, 맨 아래는 서랍 대신 동그란 통이 놓여있어 들춰보면 음식물 쓰레기를 버릴 수 있게 만들어 놓았기도 하고 이런 식이다. 치밀한 배려가 가져다주는 편안함이라고 할까. 완벽하게 갖춰진 모형 안에 있자니 나도 지브리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 요리를 시작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행복했다.


특히 서양권 관람객들은 커다란 가마솥(?)이 있는 일본식 부엌에서 나올줄을 몰라 하더라. 나야 실생활에서는 본 적 없지만 그래도 이런저런 시대극이나 민속촌 등에서 간접경험은 해 보았는데, 저들은 이런 방식 자체를 난생 처음 접하는 것일거다. 자기들끼리 막 신난다고 뒤적여보는데 재밌었다.




전시를 다 봤다고 끝난 게 아니다. 1층의 '토성좌'에서는 지브리 미술관 한정 단편영화를 감상할 수 있있다. 몇 달 주기로 작품이 바뀌는데, 지금은 귀여운 풀벌레가 등장하는 작품이다. 14분 남짓 짧은 러닝타임 안에 나름대로 풍부한 내용이 담겨있다. 지브리 특유의 따뜻하고 감각적인 그림체가 만나 기분좋은 시간을 선물한다.



마지막으로 지브리 굿즈들이 모여있는 기념품샵과, 지브리 영화에 등장했던 음식을 그대로(?) 재현해서 판매하는 카페도 들를 만하다. 줄 서서 기다릴 수만 있다면 말이다. 줄 안 서고도 갈 수 있는 건 옥상과 정원 정도가 아닐까. 건물 안에서와 달리 옥상과 정원에서는 사진 촬영이 가능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인증샷'이 아쉬웠던 사람들이 몰려든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지브리 박물관을 소개하면서 "만든 사람의 의도가 잘 전달되고,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우며, 애니메이션을 감상하는 방법을 새롭게 창조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 곳을 둘러보고 나온 소감, 미야자키 하야오가 바란대로 된 것 같다. 생각해보니 나에게 지브리는 오래된 친구 같은 존재였다. 영화마다의 스토리가 다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신작을 제외한) 모든 영화가 그럭저럭 익숙하게 느껴진다. 어쨌든 나와 엇비슷한 세대라면, 지브리의 주요 작품들은 이런저런 기회로 한번쯤 볼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나에게 지브리 미술관은 글쎄, 오래된 친구의 진심을 확인하는 것 같았달까. 이런저런 감상과 체험을 마치고 나니 지브리 영화가, 지브리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 더 가깝게 느껴졌다.


오랜 세월 지브리를 사랑해 온 일본의 지브리 팬들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지브리 팬 부모님 손에 이끌려 왔다가 생각지 않게 '체험형 미술관'을 만나 활개를 펼 수 있게 된 어린 아이들에게는?


이 곳 지브리 미술관은 어느 한 관점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체험형 전시를 통해 관람객 한 사람 한 사람의 세계관에 지브리가 자연스럽게 녹아들도록 함으로써, 백이면 백 다른 감상을 가지고 나설 수 있는 공간이다.


나에게는 이런 의미였지만, 이 글을 읽는 여러분에게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가지 않을까. 도쿄에 오실 일이 있다면 한번쯤은. 추천해본다.



※ 사진 출처 : 지브리미술관 공식 홈페이지(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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