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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데이수 Aug 26. 2020

우연히 마주친 순간의 아름다움을 포착하다.

지속가능한 예술에의 한 걸음, 올라퍼 엘리아슨 展

원형의 공간을 암막커튼으로 둘러 싸 외부에서 오는 빛을 차단해두었다.


그 공간에 처음 들어서고 몇 분 정도는 게임의 규칙을 이해하는 데 써야 한다. 게임의 규칙은 이렇다. 중앙에 작은 연못이 있다. 연못 표면에 동그라미 모양을 투사하고, 이 동그라미를 천장에 그대로 옮겨놓았다. 잔잔하던 연못에 주기적으로 파문이 인다. 파문이 연못 표면에 전달되어 동그라미가 이지러진다. 이지러지는 순간의 불규칙한 무늬가 천장에 확대되어 보인다.


파문이 비교적 잔잔한 동안에는 동그라미의 형태가 유지된다. 파문이 커질수록 동그라미의 형태를 찾아보기 어렵게 된다. 대신에 연기 같기도, 안개 같기도 한 무늬가 순간 스쳐지나간다. 스쳐지나간다, 고 말할수밖에 없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한 번 흘러간 강물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작품에서 느끼는 아름다움도 그렇다. 가슴 시리게 아름다우나, 그 아름다움은 순간에 머물뿐 반복하여 볼 수가 없다.


Olafur Eliasson, Sometimes the river is the bridge (2020) (사진출처: 도쿄도현대미술관 홈페이지)


도쿄도현대미술관의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 전시 리뷰, 시작합니다.





코로나 시대의 미술관


코로나가 내게서 앗아간 즐거움 중 하나가 미술 전시였다. 3월부터 5월 사이에는 대부분 미술관이 아예 휴관을 했고, 재개장 한 직후에는 아직 바이러스 확산 방지를 위한 매뉴얼이 잘 정착되어 있지 않은 탓인지 장내가 어수선해서 관람이 그다지 즐겁지 않았다. 많은 미술관들이 6월에 재개장을 하고 어느덧 3개월 가까이 지났으니 이제 좀 안정을 찾지 않았을까, 해서 다시 미술관을 찾았다.


미술관 내부에서 바라 본 바깥 풍경. 더웠다.


확실히 지난 6월에 비해서는 전염병 확산 방지 매뉴얼이 잘 정착한 모습이다. 입장 시 체온을 재고, 손소독제 사용을 유도하고, 추후 이 미술관이 클러스터(집단감염지역)로 밝혀졌을 경우 소식을 안내받을 수 있도록 QR코드를 등록하도록 해 놓았다. 입장권을 확인하는 절차도 예전에는 도장을 찍던 것을 QR코드를 찍는 것으로 바꾸는 등 가능한 범위에서 접촉을 줄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전시장 내 입장인원수도 체크해서, 인원이 넘친다 싶으면 입구에서 대기하도록 안내하기도. 우왕좌왕 하는 것 없이 안내가 잘 되어 있어서 편안하게 관람했다.


물론 아쉬운 점은 있었다. 작가와의 대화, 도슨트, 미술 평론가가 참여하는 세미나 등 전시기간 중 개최되던 이벤트가 모조리 취소된 것이다. 평소라면 관람자가 자유롭게 넘겨볼 수 있도록 비치했을 책도 못 만지게 고정시켜놓는 등 작품 특성에 따라서는 100% 즐기기 어려운 환경이었던 것도 사실이고.


내가 본 올라퍼 엘리아슨 전시는 작품 그 자체가 주는 아름다움이 한 축을 이루는 한편, 다른 한 축에는 작가가 세상에 던지는 메시지 - 이야기할 거리 - 가 있었다. 작가가 직접 전시장에 방문해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미술 평론가들이 그 논의를 확대시키고, 관람객들이 체험 세션에 참여해 작가의 메시지를 몸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 게 아쉬웠다. 전시가 좋았던 만큼 그 빈자리가 더 아쉽게 느껴졌던 것 같다.



지속가능한 예술을 꿈꾸며


올라퍼 엘리아슨은 덴마크 출신으로 빛이나 물, 안개 같은 자연현상이 주는 새로운 지각 경험을 실내 전시공간에 재현해놓는 형태의 설치미술로 잘 알려진 작가다. 베를린과 코펜하겐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사람 이름을 어디서 들어봤나 했는데, 2017년 삼성 리움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열었던 적이 있다고 한다. 흠, 얼핏 들어만 보고 가보지는 않았었나보다.


전시를 여는 인삿말을 잘 읽어보니, 이번 전시 <Sometimes the river is the bridge>를 준비하면서 그가 특별히 신경을 쓴 포인트가 있는 것 같다. 그는 작품을 통해 기후문제와 지속가능성에 대해 세상에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런 메시지가 설득력을 가지려면 메시지를 보내는 작가 역시 기후문제와 지속가능성에 대해 고민하고 어떠한 형태로든 기여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지속가능한 예술에의 한 걸음을 옮겼다. 전시작품을 베를린에서 도쿄로 옮길 때, 비행기를 이용하면 아주 편리하지만, 엄청난 탄소발자국(Carbon footprint)가 남는다. 탄소발자국을 줄이기 위해 기차와 배를 이용하기로 했다. 베를린에서 폴란드와 러시아를 거쳐, 중국까지는 기차로 운반하고, 중국에서 일본까지의 나머지 여정은 배편을 이용했다. 얼핏 생각해도 쉽지 않은 여정이었을 게 느껴진다. 물류허브에서 아무렇게나 던져지는 택배박스도 아니고 설치미술 작품인데 말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더 놀라운 부분. 역시 예술가답게, 실천하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고 그 실천을 또 다른 메시지로 표현했다. 아래 사진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운반 과정에서 전시작품 옆에 드로잉머신을 같이 넣어두었다고 한다. 이 드로잉머신이 기차와 배에서의 움직임을 기록했고, 그 기록이 모여 또 다른 작품이 되었다.


Olafur Eliasson, Memories from the critical zone (2020)


그 외에, 설치미술을 제작하는 입장에서 엘리아슨 스스로의 고민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도 전시해두었다. 제작과정에서 시행착오로 버려지는 재료들을 다른 형태로 가공해 재활용하는 방안, 유리나 고무를 대체할 수 있는 친환경 소재를 찾기 위한 방안 등이 그것이다.


왼쪽 사진은 친환경 나무소재와 친환경 염색약이고, 오른쪽 사진은 설치작품에 쓰일 수 있는 친환경 소재 샘플이다.


자연을 사랑해서 자연에 대한 작품을 만들어요, 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에 대한 작품을 만드는 데 있어 자연을 덜 해치는 방법을 고민해요, 에 이르니 메신저 엘리아슨에게도 훨씬 더 신뢰가 간다.


인간의 모든 행동에는 탄소발자국이 따라옵니다. 정부나 국제사회가 기후문제 해결을 위해 과감한 행동에 나서야 할 때입니다.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한정적인 게 사실이죠. 그러나 정부나 국제사회를 움직이려면, 우리가 우리 각자의 분야에서 각자의 수단을 활용해 최대한의 노력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요?    - 올라퍼 엘리아슨



우연히 마주친 그 순간의 아름다움


빛이나 물, 안개 같은 요소들을 미술작품에 대입하는 건 아주 드문일이 아니다.


이 얼마나 매혹적인 주제인가. 나는 어렸을 적 계곡에 놀러가면 물놀이 하는 것보다 가만히 앉아서 물방울을 튀기는 데 더 관심이 많았다. 손가락으로 물방울을 만들어 흐트러뜨리면 불규칙한 형태의 물방울들이 햇빛을 만나 마치 보석처럼 보였다. 초록색 나무 방향으로 튀기면 초록색 보석이 되고, 하늘 높이 튀기면 하늘색 보석이 됐다. 그 순간순간의 아름다움이 너무나 신기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물방울을 튀기곤 했다.


지금도 나는 정교하게 세공된 다이아몬드보다
찰나의 순간 존재했다가 사라지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그 물방울들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다시 올라퍼 엘리아슨의 전시 이야기로 돌아가면, 그는 자연의 요소들이 빚어내는 우연한 순간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미술작품으로 옮길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을 아주 많이 한 것 같았다. 그 고민이 적어도 나에게는 유효했다.


미술작품을 감상하면서 고양감을 느낄때가 있다. 설명하기 어려운 감각이다. 어떻게든 설명해보자면, 작품이 주는 아름다움이 나를 찰나의 순간 이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데려가주는 것 같은 기분이다. 누구에게나 고양감을 느끼는 매개체가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밤새 게임을 하다가 승부욕이 충족된 순간에, 누군가는 시험합격이든 취업이든 간절히 바라던 무언가를 성취하는 순간에, 누군가는 스릴 넘치는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는 순간에 고양감을 느낀다. 그 순간에 각자 느끼는 감각은 다 다르겠지만, 분명한 건 한 번 느껴보면 잊을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것 같은 그 아찔한 기분 말이다.


이 글의 서두에 Sometimes the river is the bridge를 보고 난 감상을 길게 적었었다. 실은 글로 풀어쓰기가 어려웠다. 그만큼 압도적인 경험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미술작품을 보고 아찔함을 느꼈다. 그 아찔함을 글로 옮겨두고 싶어서 오랜만에 <일본 미술관 산책> 매거진을 켰던 것도 있다.


그 외에도 좋은 작품이 많았다. 예를 들어, 아래 사진으로 보이는 Beauty도 아주 좋았다. 역시 외부의 빛이 차단된 공간을 만들어놓고, 천장에서 물방울을 흘려보낸다. 물방울 쪽으로 빛을 비춰주면 무지개색 프리즘이 생긴다. 누가 어느 각도에서 보는지에 따라, 그리고 그 순간 빛과 물방울이 각각 어디에 위치해있는지에 따라 프리즘의 모양은 하나로 정해지지 않고 끊임없이 유동한다. 이 작품의 프리즘에도 완전히 매료되어 한참을 쳐다보고 있었다.


Olafur Eliasson, Beauty (1993) (사진출처: 도쿄도 현대미술관)



미술관에서의 사진촬영,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 멋진 전시에도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이 있다.


전시장이 너무 시끄러웠다.


전시장에서 사진촬영을 전면 허용하고 있는데다가,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이 전시회가 인스타에서 흥했는지 인스타 사진 건져보려는 일본 여자아이들이 전시장을 점령했다. 작품 앞에 서서 포즈를 잡고, 카메라 셔터 소리를 내고, 자기들끼리 꺄르르 시끄럽게 떠들고. 등등.


잘 모르겠다. 작가가 생각하기에 이 전시는 관람자의 체험이 중요하니까,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사진도 찍고 하는 과정에서 작품을 더 잘 즐길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 것일까? 만약 그랬다면, 몇몇 작품에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사진촬영을 허가해줄 수는 없었던 걸까? 다른 사람의 감상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조심스럽게 사진 찍는 건 오케이, 근데 사진촬영이 허가된 전시에 여러 번 가본 경험상 그런 사람이 다수더라도, 배려없는 소수의 사람들이 꼭 있기 때문에 무조건 관람을 방해받게 된다.


물론 사진이 참... 어떻게 찍어도 에쁘게 잘 나오긴 하더라. 올라퍼 엘리아슨도 그래서 사진촬영에 관대한걸까? 자기 작품이 사진 찍으면 무조건 예쁘게 나올거라는 자신감이 있어서?


Olafur Eliasson, Your happening, has happened, will happen (2020)
Olafur Eliasson, Beyond-human resonator (2019)





사실... 일본의 일일 감염자수를 보고 있으면 밖에 나가기가 무섭다. 집에만 있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출근은 한다. 출근길 지하철을 타면 코로나 이전과 비교하면 대략 7~80% 정도의 사람이 타고있다. 4~5월 긴급사태 기간 중에는 5~60% 정도였으니 체감상 사무실 출근하는 사람이 좀 더 늘었다고 느낀다. 매일 출근도 하는 판에,    되는 취미생활마저 포기하는   억울하다.


막상 가 보니, 미술관은 국공립이 많아서 그런지 방역수칙을 나름 철저하게 지키는 편이다. 나 역시 미술관에 갈 때는 몇 개 없는 KF95 마스크를 챙겨가고, 손소독제를 수시로 사용하고 웬만해서는 뭐 만지지 않는 등 주의하고 있다. 이 정도면...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관심가는 전시가 있으면 종종 들러보아야겠다. <일본 미술관 산책> 매거진도 다시 찾아올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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