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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데이수 Aug 30. 2020

5가지 키워드로 보는 인터넷 시대의 예술

미디어 아티스트 exonemo의 <UN-DEAD-LINK> 展

동시대 예술가의 전시회에 가는 걸 좋아한다. 좋아하긴 하는데, 고르기가 영 어렵다. 순전히 예술가들 이름을 몰라서다. 모네나 르누아르 같은 옛날 사람 이름은 아는데, 요즘 사람들 이름까지 알기에는 내가 참 문외한이다. 전시를 보러 가고는 싶은데 뭐가 좋을지 모르겠을 때는 지금 하고있는 전시회 소개 페이지를 뒤적여 마음에 드는 키워드를 찾는다. 오늘 꽂힌 키워드는 인터넷 예술(Internet Art)이었다. 회화 예술, 사진 예술은 들어봤는데 인터넷 예술은 또 무슨 말인가. 궁금한 마음에 훌쩍 다녀왔고, 전시가 참 좋아서 블로그에도 공유해본다.



오늘 다녀온 전시회의 풀 네임, 도쿄도사진미술관의 미디어 아티스트 exonemo 전시회, <UN-DEAD-LINK: Reconnecting with Internet Art>다.


# 관련글: 도쿄도사진미술관 소개글





exonemo는 뉴욕에 거점을 두고 활동하고 있는 일본인 아티스트 그룹으로, 1990년대 후반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줄곧 디지털과 아날로그 세계 사이에서 기술과 사람의 관계를 탐구하는 내용의 실험적인 프로젝트를 쌓아오고 있다고 한다.


전시회 입구부터 아주 독특했다. exonemo 라는 이름의 각 글자를 독특한 방법으로 디자인한 작품을 메인에 걸어두었다. O는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행성들을 형상화한 것 같고, M 자리에는 컴퓨터 모니터를 갖다두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비트코인 가격을 최근 6개월간 그래프로 만들어 둔 것이다. 워낙 변동성이 큰 상품이라 마음을 열고 보니 M 모양으로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마지막 O 자리는 로봇팔이 채우고 있다. 핑크색 페인트가 칠해진 붓을 매달고 삐걱삐걱 돌아가며 원을 그린다.


허허, 이 친구들 자의식이 대단하구만. 첫 감상은 그랬다.


E 부분이 실은 알파벳 모양의 풍선이다. 주기적으로 바람을 넣었다 뺐다 하는데 기다리다가 지루해서 그냥 바람빠진 채 찍었다. 자기들 이름 하나 가지고 이렇게까지 공들여 표현하다니.


슬슬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려고 보니 신기한 게 눈에 띈다. 바닥에 5가지 색깔의 전선을 깔아놓고, 각각의 전선에 해시태그를 붙여놓은 게 아닌가. #인터넷 #플랫폼 #인터페이스 #랜덤 #바운더리 가 그것이다.


전시를 보여주는 방식에서부터 네트워크의 아이디어를 차용하고 있다. 각각의 전선이 하나의 아이디어를 잇는 링크(Link) 역할을 한다.


이 아이디어 참 좋다고 생각했다.


각각의 작품마다 적게는 2개, 많게는 4개의 해시태그가 붙어있다. 예를 들면 #플랫폼 #랜덤 이라는 식이다. 아무렇게나 붙인 건 아니고, 작품의 주제의식을 요약하는 단어이다. #플랫폼 에 대응하는 노란 링크(Link)와, #랜덤 에 대응하는 파란 링크가 그 작품의 노드(Nod)에 가서 붙는다. 그렇게 전시실 바닥을 전선이 빼곡하게 채우고 있어서, 작품을 꼭 순서대로 감상할 필요가 없어진다. 마음에 드는 키워드의 전선을 이리저리 따라가면서 좀 더 참여적으로 감상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전시실 바닥의 링크를 따라가다 보면 내가 찾는 주제를 다루는 다른 노드에 닿게 된다.


네트워크를 다루는 전시에서, 전시를 보여주는 방식에 네트워크의 아이디어를 차용하고 있다는 게 신선하게 느껴졌다.


내가 요즘 개인적으로 도전하고 있는 책이 있다. 더글라스 호프스태터의 <괴델 에셔 바흐>라는 책이다. 이 책이 어떤 책이냐면, 인터넷에 검색을 해 보면 "읽어보려고 했는데"까지는 많이 찾을 수 있는데 "읽었는데"의 수는 현저히 줄어들고, "읽어보니 이렇더라"는 거의 없다시피 한 책이다. 이 책은 1979년에 출간되었는데, 그 시절에 이미 컴퓨터와 인공지능이 해결해야 할 핵심적인 모순에 대해 논했으며, 40여년이 흐른 오늘날까지도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고민해야 할 의제를 던져주고 있는 괴물같은 책이다.


(한편, 독자 입장에서도 괴물같다. 일단 책 길이가 1000페이지가 넘는다. 어려운 얘기를 쉽게 해 주면 좋을텐데, 이 부분에서 작가가 독자를 배려할 마음이 전혀 없어보인다. 뭐 하나 순순히 알려주는 법 없이 한 챕터 한 챕터 알쏭달쏭한 수수께끼를 내서 독자가 스스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전시회 얘기 하다가 이 책 얘기를 왜 하느냐면, exonemo가 인터넷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이 호프스태터 교수가 <괴델 에셔 바흐>에서 이야기하는 방식과 아주 닮아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말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머리 아프게 느껴질 수 있는 이야기지만, 최대한 쉽게 풀어서 이야기하면, 네트워크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네트워크 이론을 차용한다 거나, 페인트를 표현하기 위해 페인트 화면을 차용한다는, 자기지시(self–reference)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exonemo, <HEAVY BODY PAINT> (2016)


페인트를 표현하기 위해 페인트 화면을 차용한다는 건 위 사진에 보이는 <HEAVY BODY PAINT> 의 얘기다. (#인터페이스 #바운더리)


전시장에 실제로 페인트 본체가 있다. 작품은 거대한 LCD 모니터 3개로 구성되어 있다. 자세히 보면 중앙의 페인트 부분은 모니터에 비치는 화면이 맞는데, 나머지 배경색 부분은 페인트로 아예 칠해버렸다.


이 작품의 알쏭달쏭한 매력은 물리공간에서의 실체(페인트 실물)와 가상공간에서의 실체(페인트 영상)가 서로 다른 층위에 있는데도, 마치 같은 층위에 있는 것처럼 캔버스 같은 모니터 위에서 서로 뒤섞여있다는 데 있다.


한편, 비슷한 주제를 조금 다른 관점으로 다룬 작품도 있다. 아래 사진의 <Realm> 이라는 작품이다. (#인터넷 #플랫폼 #인터페이스 #바운더리)


전시실에 들어가면 일단 아름다운 자연 풍경이 보이고, QR코드를 찍어보라는 안내판이 있다. 착한 감상자로서 QR코드 찍으라면 찍어줘야지. 찍어보니 안개낀 것 같은 흐릿한 화면이 든다. 이게 뭐야? 하고 화면을 터치하니 웬 지문이 찍힌다. 한참을 씨름하다가 정면의 자연 풍경을 다시 보니 이게 웬걸, 나의 지문이 화면에 그대로 찍히고 있는 게 아닌가. 자세히 보니 화면 하단에 이런 메시지도 있었다.


You can't see there from your mobile


exonemo, <Realm> (2020)


문득 깨달음이 왔다. 작가가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혹시, 재현된 현실은 현실이 아니라는 게 아니었을까?


화면 너머에 너무 간절한 무언가가 있을 때 소용없는 걸 알면서도 손을 뻗어 화면을 만져보고, 그런다고 화면 너머의 물리적 실체에게 가 닿지 않는 걸 깨닫고는 쓸쓸해진 경험, 여러분에게는 없으신가요?


나는 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사랑하는 연인을 만날 수 없게 된 지도 어느덧 반 년이 넘었다. 매일 통화도 하고, 가끔은 화상채팅도 하지만, 역시나 부족하다. 가끔 새벽감성에 차올라 스마트폰 화면 속 연인의 얼굴을 속절없이 만져볼 때가 있다. <Realm>을 보면서, 나의 그 행위에서 감정을 빼고 본질만 차갑게 보여주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걸 깨달은 순간, 심장이 욱씬했다. 스마트폰 화면 너머 속 사랑하는 물리적 실체들과, 그에게 가서 닿고 싶으나 스마트폰 액정에 가로막혀 지문만 남기고 마는 나의 속절없는 시도들.





너무 슬퍼지니까 분위기를 좀 바꿔볼까. 이 전시의 또 다른 백미는 블랙코미디에 있다. 나는 전생에 영국인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블랙코미디를 사랑한다. 아래 사진의 작품을 보자. 제목이 뭐냐면, <Spiritual Computer: Pray>이다. (#인터페이스 #바운더리) 영적인 컴퓨터? 기도?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exonemo, Spiritual Computing : Pray (2009) 


이런 작품은 나 혼자 이해하겠다고 눈 부릅뜨고 볼 게 아니라 작가가 친절하게 붙여 준 설명을 꼭 봐야 한다. 사진의 오른쪽 하단을 보면 마우스 두 개가 등을 맞대고 있다. 광마우스는 마우스 하단의 빛을 인식해서 커서를 움직이는 방식인데, 하나의 컴퓨터에 두 개의 마우스를 연결해놓고 등을 맞대어 놓으면 마우스1의 빛이 마우스2에 가고, 마우스2의 빛이 다시 마우스1에 돌아가는 식으로 빛 반사를 주고받기 때문에 가만히 둬도 미세한 움직임이 나타나게 된다.


작가는 마우스가 등을 맞대고 붙어있는 모습에서 기도하는 손을 상상했고,

인위적인 조작 없이도 커서가 움직이는 모습에서는 영적인(Spiritual) 무언가를 상상했다.


와, 이런 게 재기발랄한 상상력이죠. 재밌다. 나 초등학교 때 친구들이랑 분신사바 많이 했는데 그것도 생각이 났다. 친구 손 꼭 붙잡고 영적인 주문을 외우면 (누가 움직였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저절로 손이 움직여 소름이 쫙 끼쳤던 순간들 말이다.


exonemo, <Danmatsu Mouse> (2007)


이 작품도 얘기 안할 수 없다. 영어 제목은 <Danmatsu Mouse> 지만, 이 경우에는 반드시 일본어 제목을 봐 줘야 한다. 단말마우스다. 断末魔ウス.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른다고 할 때 그 단말마와, 마우스를 합쳐서 만든 언어유희 조어다. (#인터페이스 #랜덤 #바운더리)


사진을 잘 보면 마우스들이 다 산산조각 나 있다. 마우스를 산산조각 내는 과정을 보여주는 게 단말마우스의 컨셉이다. 전기톱으로 자르기도 하고, 자동차 뒷바퀴로 콰지직 밟아버리기도 한다. 이 과정을 뭘로 보여주냐면, 그 마우스와 연결되어 있는 모니터에 영상을 띄워서 보여준다.


마우스의 실체가 산산이 부서지는 그 순간에도 마우스 커서는 게속 그 자리에 있다. 전기톱이 마우스의 센서까지 박살내기 전까지는 커서가 전기톱의 움직임에 맞춰 불규칙하게 움직이다가, 센서까지 박살내고 나면 그제서야 멈춘다. 사실 커서 입장에서는 마우스 다른 거 연결하면 될 일이니 아무 생각 없을텐데, 나는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커서의 움직임을 보니까, 커서의 가냘픈 움직임이 마치 "아파!"라고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제가 블랙코미디 좋아하긴 하는데요, 이거는 조금 너무 악취미 아닌가요.


아이디어가 너무 재미있었다. 이 작품도 역시, 물리적 실체와 가상공간 사이의 관계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다른 작품들과 같은 맥락에 놓고 볼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단말마우스와 비슷한 컨셉의 또 다른 작품인 <Shotgun Texting>이다. (#인터페이스 #랜덤 #바운더리)


exonemo, <Shotgun Texting> (2019)


나는 게임을 잘 안 해서 몰랐는데, 게임에 지거나 해서 열받아서 키보드를 쾅 내려칠 때 불규칙한 텍스트들이 나타나는 걸 샷건 텍스팅이라고 한단다. 작가는 아주 못되게도, 그 단어에서 영감을 받아 키보드를 샷건으로 쏴 보기로 한다. 키보드가 총을 맞는 그 순간 인식되는 텍스트를 모니터에 보여준다는 컨셉이다.


키보드 괴롭히려고 인적이 드문 산 속 사냥꾼의 집으로 찾아가, 작품 컨셉을 설명하고, 적당한 위치에 키보드를 세팅한 다음, 사냥꾼 아저씨에게 샷건 쏘는 방법을 배워서 키보드에 샷건을 날리는 장면을 영상으로 촬영해 보여주는데 참, 악취미도 이만큼 부지런해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웃기는 사람들이다.


나만큼이나 키보드도 화가 났는지, 단말마의 비명처럼 ecccccccccc... 라는 텍스트를 모니터에 남기고 떠나셨다. 미국이나 일본에서도 이씨 하면 욕처럼 들릴까? 한국에서 이씨는 까딱하면 욕이 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에, 나는 그 텍스트에서 괜히 키보드의 억하심정이 느껴져 하하 웃었다. 나쁜 엑소네모. 불쌍한 키보드. :)





정리하다보니 재밌는 게, 이 전시에 분명히 5가지나 되는 키워드가 있었음에도, 내가 흥미를 느낀 작품들을 뽑아보니 공통적으로 #인터페이스 와 #바운더리 를 포함하고 있었다. 둘 다 관심있는 키워드가 맞아서 신기했다.


단순히 인터넷 예술 이라는 키워드가 궁금해서 찾아 간 전시회였는데, 대만족하고 돌아왔다.


<괴델 에셔 바흐>도 그렇고, exonemo의  <UN-DEAD-LINK> 전시회도 그렇고, #인터페이스와 #바운더리 라는 키워드로 현실세계와 가상세계 사이의 경계를 고민하고 있다. 나도 매일 고민한다. 모든 커뮤니케이션이 비대면으로 옮겨가고 있는 코로나 시대, 물리적 실체로 존재해야 하는 인간으로서 나는 앞으로 뭐 해먹고 살아야 하는가. 나의 물리적 실체가 가상세계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 뭐 이런 것들 말이다. 하여간에 매일 쓸데없는 고민만 하고 산다.


미디어 아트 라고 하면 내게 다소 생소한 장르였는데, 우연한 호기심 덕분에 좋은 아티스트를 알게 되어 기뻤다. <일본 미술관 산책>, 다음에 또 재미있는 전시를 발견하면 찾아오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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