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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데이수 Oct 07. 2020

개인주의자가 꿈꾸는 공동체

<오늘부터의 세계>를 읽고, 따로 또 같이 살아가는 법을 고민하다.

몇년전에 ‘땅콩주택’이란 게 유행한 적이 있었다. 아파트를 답답하게 느끼는 사람이 있지만, 전원주택으로 덜컥 넘어가기에는 부담이 되는 게 사실이다. ‘땅콩주택’은 말하자면 ‘짬짜면’ 같은 옵션을 제공했다. 컴팩트한 공간활용으로 가격이 저렴하고, 주택단지에 한 가족만 덩그러미 떨어져 있으면 외로울 수 있으니 친구와 같이 살 수 있도록 두 집을 하나로 합쳐주었다.


그 때 독서모임에서 ‘땅콩주택’에 대한 책을 같이 읽었다. 우리가 각자 어떤 주거환경에서 살아가고 싶은지, 나아가 (굳이) 내 가족 외에 다른 누군가와 함께 공동체를 형성해 살아가는 게 좋은 생각일지에 대해 각자의 생각을 나눴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런 결론이 났다. 언젠가 독서모임 멤버들이 모여서 작은 마을을 만들자고. 서로의 일상에 참견하지 않고, 각자 하고 싶은 일 하면서, 때로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나눠먹거나 하면서, 따로 또 같이 지내는 마을 말이다.


7년을 함께하는 동안 독서모임 멤버들과 함께한 일요일이 많고 많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여운이 남는 날이 있다. 그 날이 그랬다. 모임 끝나고도 골똘히 생각해보았다.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도시의 아파트에서 익명성의 자유를 누리며 건조하게 지내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내 가족 말고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리울 때도 있다


우리가 따로 또 같이, 개인주의자의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


독서모임 매거진 <일요일엔 책을>, 7인의 석학에게 미래를 묻는 인터뷰 모음집 <오늘부터의 세계>를 읽고 나눈 두 번째 이야기를 시작한다.





만원 지하철과, 타인의 분비물.


법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혐오에 두 가지 차원이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몸에서 배출되는 분비물, 노폐물에 대해 느끼는 혐오입니다. 대소변, 피, 콧물 등 우리의 동물성에 대한 거부 표현으로 모든 사회에서 작동하죠. 이런 사고 속에 또 다른 종류의 혐오가 파고듭니다. 문화 차원의 혐오로 저는 이를 ‘투사혐오’라고 불러요. 부패 냄새, 분비물 같은 역겨운 특성을 우리 사회의 특정 집단에 투자해 그들을 종속시킬 전략으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선데이수는 이 문장을 읽고 만원 지하철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2020년 여름, 일본의 코로나 확산세가 절정에 달했던 때다. 일본의 여름은 습하고 무덥기로 유명하다. 환기를 위해 지하철 창문을 열고 다니니 아무리 에어컨을 켜도 텁텁한 공기가 남았다. 그런 날 지하철에 다닥다닥 붙어가다가 축축한 무언가가 느껴질 때가 있었다. 누군가 땀이 많은 사람의 몸에 닿은 것이다. 말할 수 없이 찝찝하고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축축함의 진원지에서 한 치라도 떨어져보려고 노력했었다.


땀 흘린 사람에게,
내 반응이 상처가 되었을까?


내 미묘한 기분을 A가 명쾌하게 정리해주었다. 위기가 오니까, 우리가 원래 가지고 있던 혐오가 좀 더 잘 드러나게 된 것 같단다. 선데이수도 공감한다. 마사 누스바움이 말한 것처럼 몸에서 배출되는 노폐물에 대한 혐오가 내게도 분명히 있었는데, 코로나가 비말(침)을 통해 감염된다고 알려지면서 두려움(?)이 더 커졌다. 위에서 이야기 한 만원 지하철을 타고 가다보면 주변 사람들이 다 침덩어리로 보일때가 있다. 멀리 설 수 없다면, 입과 입이 가깝지 않도록 방향이라도 지그재그로 만들어 본다.


여기에 D도 한 마디 더했다. 혐오는 굉장히 미묘하고 섬세하게 전파된다. 한국처럼 관계를 중시하는 사회에서는 더더욱 직접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눈치가 있으면 알 수 있다. 선데이수도 지하철에서 간 반사적으로 땀 흘린 사람을 확 피해 서기는 했지만, 실은 그 사람이 내 불쾌함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조심 피하는 편이 더 세련된 태도였을 것이다. 세련된 혐오도 혐오다. 그리고 때로는 투박한 혐오보다 세련된 혐오가 더 무섭다.



인터넷 공간을 부유하는 거대한 혐오의 에너지


언젠가부터 나의 일상을 규정하는 공간이 현실공간뿐 아니라 가상공간까지 확장되었다. 혐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인터넷 공간에서의 혐오를 빼놓을 수 없다. 멤버 C가 인터넷 공간에서의 혐오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보자고 주제를 꺼내놓았다.


혐오라는 에너지 자체는 그 전에도 늘 있어왔는데, IT기술의 발달로 인터넷 공간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해지면서 혐오의 대상을 손쉽게 특정할 수 있게 되었다. 누구 하나 '저격'할 만한 사람을 찾았다 하면 유튜브, 트위터,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 빠르게 '저격글'이 확산되고, 혐오가 대상화된다.


우리 모임은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데, 그 일주일 사이에 꼭 하나쯤 새로운 이슈가 있다. 누가 과거에 천인공노할 발언을 했다더라, 누가 빚을 지고 안 갚았다더라, 등등. 각각의 이슈에 대해서 이야기를 보태고 싶지는 않다. 그보다 C의 말처럼, 인터넷 공간을 부유하는 거대한 혐오의 에너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고 본다. '화력'이라는 말을 한다. 언제든지 달려가서 불같이 욕해 줄 사람이 엄청 많다는 뜻이다. 남의 일처럼 말하지만 실은 나도 굳이 댓글을 달아 참여하지 않을 뿐 조회수 +1로 일조하고 있다. 다를 게 없다.


인터뷰를 맡은 저자 안희경이 마사 누스바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 팬데믹은 우리의 숨겨진 편견과 혐오를 드러낸 것 같다고. 그러자 마사 누스바움이 이렇게 받아친다. "당신은 나와는 매우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아요. 편견과 혐오가 숨겨져 있다고 말하니까요. 제 인생을 통틀어 편견과 혐오가 숨겨져 있던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습니다." 마사 누스바움이 한국의 인터넷 공간을 경험한다면 어떤 이야기를 하려나. 문득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가 왜 꼭 도시에서 살아야 하나?


다시 현실의 공간으로 돌아와 보자. 만원지하철로 대표되는 도시의 높은 인구밀도 속 부대끼다 보니 서로에 대한 혐오만 쌓여가는 하루하루. 우리가 왜 꼭 도시에서 살아야 할까? 도시 말고 다른 대안은 없을까?


선데이수는 평생 서울에 살다가 도쿄로 이사를 왔다. 서울은 인구 1천만 명이, 도쿄는 인구 9백만 명이 사는 도시다. 어느쪽이든 아시아에서도 손꼽히는 메가시티다. 도시에 사는 게 좋으면서도, 만원지하철은 싫다. 도심 속에서 조금이라도 한적한 장소를 찾으려 오늘도 인터넷 맛집검색에 시간을 쏟는다.


<오늘부터의 세계>에는 도시의 대안으로 '농촌'을 이야기하는 석학이 둘이나 있다. 원톄쥔과 반다나 사바다. 그들의 생각을 읽고 이야기 하다 보니, "내가 왜 꼭 도시에서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멤버 A는 지방에서 자라 지금은 서울에서 자취를 하고 있다. A는 앞으로도 서울에 살고 싶다고 한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문화적인 인프라. 콘서트나 전시회를 쉽게 접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익명성. 고향에서는 이웃들이 A에 대해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공부는 어느 정도 하는지, 어느 대학을 갔는지, 부모님께 연락은 얼마나 자주 하는지. 서울에 올라 와 이웃들의 관심에서 벗어 난 지금의 삶이 더 만족스럽단다.


멤버 E는 대학생 시절에 강남대로에 있는 회사에 다니는 게 로망이었다. 아쉽게도(?) 지금 직장은 좀 한적한 동네에 있다. 어느 날 평일 점심때쯤 강남대로를 걸을 일이 있었는데, 생각보다도 더 사람이 많아서 깜짝 놀랐단다. "어릴 땐 왜 그런 로망이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시니컬하게 덧붙였다.


작년까지만 해도 도시의 밀도에 지치는 순간이면 비행기를 타고 멀리멀리 여행을 떠났다. 낯선 도시를 헤매다가 호텔방의 빳빳한 이불을 덮고 잠을 청하고, 기차를 타고 차창 밖 지평선을 내다보며 '힐링'을 했다. 올해는 코로나로 일상반경을 벗어 난 이동이 어려워지다 보니 더욱 답답함이 느껴진다.


그럼 도시 말고 농촌에서 사는 건 어때요?
어떤 조건이 갖춰지면 농촌에서 살겠어요?


우리 모임에서 늘 곤란한 질문을 던지는 역할(?)을 맡고 있는 C가, 이번에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도시인에게 시골이란?


멤버 A가 유튜브 채널 하나를 소개해 주었다. MBC 현직 PD 코로나로 집에 갇혀 있다가, "이대로는  되겠다!" 하고 경북 김제에 있는  폐가를 사서 사람이  만한 집으로 바꿔나가는 과정을 브이로그로 보여주는 채널이란다 (채널명은 '오느른onulun'). 우리 멤버들이 시골에서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이야기가 쉽사리 진전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일자리다. 우리는 다 각자의 커리어가 있고, 시골에 가더라도 갑자기 현 직장을 때려치고 농사를 짓고 싶지는 않다. A 소개한 유튜브 채널이 디지털노마드의 현실적인 귀농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현재 직장을 유지하면서도, 복작복작한 도시 말고 농촌에서 살아갈  있는 방법 말이다.


그런데, 도시에 살던 사람이 농촌 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운 이유가 어디 일자리뿐인가?


실은 더 어려운 문제가 있다. <오늘부터의 세계>에서 원톄쥔과 반다나 사바가 말하는 농촌 공동체의 핵심은 '농촌' 아니라 '공동체' 있다. 이웃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집단. A의 말처럼 나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서 소름끼치기도 하지만, 그래도 맛있는 음식을 함께 나눠먹을 수 있고, 때로 혼자 헤쳐나가기엔 힘에 부치는 일을 나눠할 수 있는, 사람의 온기를 전해주는 공동체 말이다.


당장 내게 농촌에 가서 농촌 공동체의 일원이 되라고 하면, 영 어렵게 느껴진다. <1박2일>의 멤버들처럼 원체 넉살이 좋아서 어르신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그리고 그 사랑에 대해 전혀 스트레스 안 받는 사람이면 모르겠다. 나는 아닌 것 같다. 당장 어르신들을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나눠야 할지 감도 안 온다.


그래서 서두에 말한 '땅콩주택' 이야기를 하기에 이르렀다. :)


도시의 반대를 농촌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사실 서울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서울보다는 훨씬 밀도가 낮은 동네가 많이 있다. 물론 이런 곳에 나와 내 가족만 덩그러니 떨어져 나와 살기는 어렵다. 어쨌든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적인 인프라를 갖추려면 나와 함께 살아 갈 이웃이 꼭 있어야 한다. 기왕이면 그 사람들이 나와 가치관을 공유한다면 어떨까. 도시의 물리적 빡빡함과 농촌의 심리적 밀접함 사이에서 절충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평화의 이면에는
'서로를 이해할 기회가 사라진 세상'이 있다.


이야기를 꺼낸 건 B였다. 예전에는 4인 가족이 일종의 '표준'이 되어, 표준규격에 맞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넌 언제 결혼하니" "아이는 언제 낳을거니" 같은 참견을 하는 게 당연했다. 요즘은 참견을 불편해하는 사람이 늘었다. 비혼주의자에게 결혼은 "언제"의 문제가 아니다. 딩크족에게도 마찬가지로, 출산은 "언제"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 그런 질문을 받으면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차가운 개인주의자들이 작은 군락을 이뤄, 서로의 삶에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고 평화롭게 지낼 수 있다면 어떨까? 가끔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나눠 먹고, 볕이 좋으면 마당에서 커피나 한 잔 같이 하면서 말이다.


멤버 D가 쉐어하우스에서 살았던 경험을 공유해주었다. 쉐어하우스에는 공용공간이 있고 개인공간이 있다. 개인공간에도 '룸메이트'가 있어서 다른 사람과 생활을 공유하는 구조였다. 처음에는 생판 모르는 남과 '룸메이트'로 지내는 게 영 어색해서 친한 친구와 함께 입주했다. 쉐어하우스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지고 나서는 그냥 생판 모르는 남을 '룸메이트'로 받아들였다. 그게,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가족과 함께 살다보면 서운한 일이 생긴다. 가족은 서로를 이해해야 하는 사이니까. 쉐어하우스의 룸메이트는 어차피 남이니까 "내가 이렇게 행동해도 나를 이해해줄거야"가 전제되지 않는 사이다. 오히려 조심하게 된다. 상처받을 일도 적었다고 한다. 그는 이런 상상도 한단다. 쉐어하우스에서 '따로 또 같이' 살아가는 생활방식이 가상공간으로 확장되면, 가상현실(Virtual Reality, VR) 속 가상공동체가 만들어질 수 있지 않을까?


(※ 주: 이미 가상현실에서 전 세계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VR Chat이라는 서비스가 있다고 한다.)


공간적으로까지 분리가 되어 버리면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기회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까요?


마음 속으로 맞장구를 치는데, 멤버 E가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이래서 독서모임에서 이야기하는 게 재미있다. 분명히 우리들이 가치관을 공유하는 부분도 있지만, 어떤 부분에서 미묘하게 의견이 다른 지점이 있다. "기술이 우리를 풍요롭게 하리라"라는 결론으로 쉽사리 빠져들지 않도록 긴장과 균형을 유지해주는 멤버들이 있어서 좋다.


선데이수도 E의 걱정에 공감했다. 선데이수의 친한 친구 중에는 '파워차단러'가 있다. 그는 누군가 '빻은' 발언을 하면 참아주지 않고 바로 '차단'을 날린다. 그의 SNS 타임라인은 아주 평화롭다고 한다. 한편으로 아주 균질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의 코멘트로만 구성되어 있을 것이다.


친구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 마찬가지다.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 중에서도 내 취향에 맞는 커뮤니티를 택해 그들의 관점으로 이야기되는 이슈를 접하고, 정보의 홍수 속에서도 내 마음에 드는 유튜브 채널을 '구독'하여 정보를 얻는다. 내 '구독' 데이터가 저장되어, 유튜브 알고리즘도 내가 좋아할 법한 정보만 '추천'을 한다. 이미 가상공간 속 우리는 분리되어 있다. E의 말처럼 공간적으로까지 분리가 되어 버리면,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기회가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서두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 매주 일요일마다 독서모임 멤버들과 이야기를 나누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여운에 남는 날이 있다고. 내게는 <오늘부터의 세계>를 읽고 만난 날이 그랬다. 다들 바쁘면 한 주 빠지고 하는 식으로 느슨하게 운영되다 보니 세 명이 모여서 오붓하게(?) 이야기 할 때도 있는데, 이 날은 새로 온 멤버도 있고, 몇 개월 간 쉬다가 오랜만에 나타난 멤버도 있고, 북적북적한 기분이 들어서 좋았다.


독서모임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상상해본다. 각자의 공간에서 한 주를 충실하게 보내고, 일요일이면 공용공간에 모여 책을 읽고 이야기 나누는 풍경을. 각자가 그리는 삶의 방식이 다 다르니 누군가는 아이를 데려와서 "우리 얘기하는 동안 여기서 놀아" 할 수도 있을 거고, 반려견을 데리고 올 수도 있을 거고. 등등. 학생 때는 마냥 먼 훗날의 일처럼 느껴졌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멀지만 가까운 꿈처럼 느껴진다.


독서모임 매거진 <일요일엔 책을>, 어느덧 18회째를 맞았다. 다음주에는 책 이야기를 한 주 쉬고, 대신 우리 모임에 대한 이야기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우리 또 만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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