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세이도 팔러(Shiseido Parlor)에서 전통의 경양식을 만나다.
화장품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시세이도(Shiseido)라는 브랜드는 한번쯤 들어보지 않았을까. 시세이도는 1872년에 설립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화장품 브랜드다. 변화가 빠르고 경쟁도 심한 뷰티 시장에서 시세이도 라는 브랜드 가치를 오래도록 지켜왔을뿐 아니라, 유망한 글로벌 브랜드들을 거듭 인수하며 그룹 자체도 키워왔다.
시세이도 그룹은 끌레드뽀보떼, 로라메르시에, 나스, 세르주루텐, 아벤느 등 여러 프리미엄 브랜드들을 거느리고 있고, 우리에게 조금 더 익숙한 브랜드로는 몇 년 전부터 일본 드럭스토어 필수 쇼핑템으로 알려진 아넷사 썬크림이나 퍼펙트 휩 등도 있다.
지금은 일본 내수보다 해외에서 더 많은 수익을 거둘텐데도, 시세이도의 로고는 고집스럽게 도쿄 긴자에서 유래한 브랜드라는 걸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긴자 한복판에 본점 매장과 함께, 역시 1928년부터 줄곧 시세이도 팔러(Shiseido Parlor, Parlor는 응접실이라는 뜻)라는 레스토랑을 유지하고 있다.
https://parlour.shiseido.co.jp/en/index.html
이 곳에서는 오므라이스, 미트 고로케 등 일본식 서양요리 - 경양식 - 하면 떠오르는 전통의 메뉴들을 취급한다. 각 메뉴마다 최소 몇십년의 역사를 담고있는 만큼 나름의 특색이 있고 뭘 시켜도 대충 맛있다. 물론 그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맛인가 하면 좀 고개가 갸웃하지만, 힘들게 긴자까지 와서 굳이 이 곳에서 밥 먹는 이유는 맛 때문만은 아니다.
긴자에서도 아주 구식(舊式)의 아가씨 대접을 받으며,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긴자는 어떤 곳인가? 긴자는 일본에서 땅값이 제일 비싼 곳이고, 골목골목에 지인의 소개 없이는 예약조차 안 된다는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들이 즐비하며, 화려한 거리 양쪽으로 어마어마한 가격의 명품 매장들이 건물 하나씩을 차지하고 있는 곳...
하지만 정작 관광객으로서 긴자도오리(銀座通り)를 걷다보면 글쎄, 여기저기 사진찍는 사람들로 가득하고 편의점만 가려고 해도 줄을 한참 서야 한다. 서비스도 도쿄의 다른 지역에 비하면 불친절한 것 같다. (당연한 이야기다. 워낙 관광객이 많으니까.) 맛있는 게 아주 많다는데 정작 어디 가서 먹어야 할지도 모르겠고...
워낙 다들 얘기하니까 한 번쯤 구경 와 보고 싶었지만, 막상 와 보니 뭘 하고 시간을 보내야 할지 모르겠는, 적어도 나에게는 그런 곳이었다. 그래서 이 곳 시세이도 팔러에서 보낸 시간이 더욱 즐거웠다.
사실... 여기서 밥 먹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11시 반에 오픈한다는 걸 미리 알고 시간을 딱 맞춰 갔는데도 1시간 이상 대기해야 했다. 런치타임도 11시반에서 2시반까지이기 때문에, 사실상 새로 손님을 받을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다. 이 곳을 일정에 넣는다면, 가급적 오픈시간에 맞춰 이름을 적어놓고 근처를 구경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예약은 전화로만 가능하고, 그마저도 좌석수가 한정되어 있어서 미리 전화해놓지 않으면 어려운 눈치다. 그래도 자리가 나면 핸드폰으로 전화를 주는 시스템이라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지는 않았다.
우여곡절을 거쳐 드디어 가게에 들어서면, 오래된 호텔처럼 고풍스러운 인테리어와 창 밖으로 내려다보이는 긴자 거리의 풍경에 놀라게 된다. 입구에서는 유니폼을 차려입은 웨이터가 코트를 받아주고, 은식기가 세팅된 자리로 안내해준다. 은식기라니. 이거 참 황송하다고 할까.
오므라이스를 주문하면 절인 양파나 말린 과일 등을 담은 트레이를 따로 가져다준다. 케첩도 원하는만큼 더 먹을 수 있게 멋진 팟에 담아준다. 끼니를 빨리 때우고 나가야 하는 공간이라기보다는, 창 밖으로 쏟아지는 햇볕을 느끼며 천천히 이야기 나누며 식사하고, 다 먹고는 디저트까지 즐겨야 할 것 같은 분위기.
일본의 개항기를 상징하는 도시인 고베나 요코하마에 가 보면, 이진칸(異人館)이라고 하는 서양식 건물들을 관광지로 꾸며놓았다. 당시 일본에 거주했던 선교사 등이 살던 집이다. 한국에도 그런 곳이 어딘가 남아는 있을텐데, 일본처럼 아예 마을 전체를 관광지로 꾸며놓은 경우는 많지 않을 것 같다. 냉정한 자본의 논리 속에서 이런 마을이 아직까지 살아남았다는 데서, 서양식 건물이나 생활습관에 대한 일본인들의 동경이 그만큼 크다는 걸 유추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이 곳 시세이도 팔러는 마치 이진칸에 살던 유럽의 선교사들이 이런 식으로 식사하지 않았을까? 라는 일본인들의 상상 - 판타지 - 을 현실에 구현해 낸 것 같은 곳이다. 은식기하며, (설거지하기가 곤란할 만큼) 과하게 제공되는 각종 여분의 그릇들, 혹시라도 식사를 방해하지 않도록 완벽한 매너로 조심스럽게 서빙하는 웨이터들까지.
서양에 대한 동경을 일본식으로 해석해 긴자 한복판에 옮겨놓고, 꾸준히 갈고닦아 그 자체를 또 다른 '일본의' 전통으로 탈바꿈 시키기까지, 너무나 일본 답다고 해야할까. 긴자에 왔다면 한 번쯤은. 점심 한 끼 치고는 가격이 조금 비싸기는 하지만, 전통의 경양식을 제대로 경험하는 데 투자한다고 생각한다면, 추천할 만 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