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치코버스와 함께하는 시부야구 투어
일본의 6월은 쯔유(梅雨)의 계절이라, 거의 한 달 내내 햇빛 보기가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올해는 이상하리만큼 장마가 짧고 비도 거의 내리지 않아 눈 깜짝할 사이에 여름이 시작된 기분이다. 과연 오전 9시에만 나가봐도 햇볕이 강해 썬글라스 없이는 눈을 뜨기가 어려울 정도다. 요즘 같아서는 거의 오후 5~6시는 되어야 햇볕이 한 풀 꺾여 그나마 돌아다닐 수 있는 정도가 된다.
한 여름 도쿄도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겠지만, 그래도 하루종일 햇볕 속을 돌아다니기는 어려우니 대안을 찾게 된다. 당장 생각나는 건 쇼핑몰이나 미술관. 하루이틀 정도는 괜찮지만, 그래도 기왕 도쿄에 왔으니 손님을 위해 꾸며놓은 곳 말고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공간도 엿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래서 제안해보는 도쿄 마을버스 투어.
<하치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도쿄 시부야구의 상징, 하치코와 함께할 수 있다.
사실 도쿄도는 아주 크지만 그 중에서도 도심부를 도쿄23구라고 부른다. 치요다구, 추오구, 미나토구, 신주쿠구 등등. 시부야구는 23구 중 하나로, 흔히 생각하는 시부야역(渋谷駅) 앞 외에도 여러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다이칸야마, 오모테산도, 하라주쿠, 요요기, 히로오, 에비스, 아오야마 일부 등. 거리 자체가 유명하기도 하고, 트렌디한 맛집이나 편집샵 등이 많아 하나하나 관광으로도 많이 찾는 곳들이다.
이 시부야구에서 운영하는 마을버스가 하치코 버스다.
하치코는 도쿄의 한 대학교수가 키우던 강아지였는데, 매번 교수가 출근할 때마다 시부야역까지 배웅을 나갔다고 한다. 어느 날 대학교수가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주인을 잃은 하치코는 교수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매일 시부야역에서 기다렸다고. 이 이야기가 언론에 미담으로 보도되고, <하치 이야기>라는 책으로도 만들어져 시부야역의 상징처럼 되었다. 실제로 시부야역에 가면 하치코 출구가 있고, 이 출구로 나가면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품고 서서 약속상대를 기다리고 있다.
하치코 버스는 시부야구의 주요스팟들을 골목골목 짚어주면서도, 시부야구에서 운영하기 때문에 교통비 비싸기로 유명한 일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저렴한 금액 단돈 100엔에 이용할 수 있어 굉장한 메리트가 있다.
게다가 번역이 아주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국어 사이트가 있어 관광객들이 참고하기에도 좋다. (http://www.city.shibuya.tokyo.jp.k.mu.hp.transer.com/kurashi/kotsu/hachiko_bus/index.html?=20170605yokumi)
공식 사이트에 잘 소개가 되어 있지만, 하치 코 버스는 노선이 총 4개가 있고 빨간색, 주황색, 노란색, 파란색의 차체 색깔로 구분된다. 가보고 싶은 곳을 먼저 고르고, 그 곳을 지나가는 노선을 선택하면 된다. 홈페이지에서 버스가 몇 시 몇 분에 각 정류소에 도착하는지를 빼곡이 적어놓은 타임테이블을 내려받을 수 있고, 버스가 놀라울 정도로 시간을 딱 맞춰서 도착하니 시간 맞춰 정류소에 잘 서있기만 하면 된다.
참고로 하치코 버스는 느리다. 정말 이래도 되나 싶을만큼 느리다. 조금 번거롭더라도 지하철을 타고 이동했더라면 20분이면 도착했을 거리를 한 시간씩 걸려서 느릿느릿 달린다.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시부야구의 행정구역 내로만 경로를 설정하려고 하다보니, 다른 구로 삐져나가지 않기 위해 골목이나 언덕길을 애용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안 그래도 도쿄 도심은 차선이 좁은데, 그 중에서도 특별히 골목길만 찾아 다니려다 보니 속도를 내는 것 자체가 요원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꼭 몇시까지 어디로 가야만 하는 일정이 있다면 별로 추천하지 않고, 대신 점(스팟) 이 아닌 선(가는 길)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여행자에게라면 추천한다. 여기와 저기 사이. 지하철을 타고 순식간에 지나갈 때에는 잘 보이지 않았던 디테일들을 차창 밖으로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나는 어디 여행갈 일이 있으면 에버노트부터 켠다.
비행기가 몇시에 어디에 도착하면 몇시에는 뭘 하고 몇시에는 뭘 하고, 빼곡하게 일정을 채우다보면 낯선 곳에서 헤맬 걱정이 없어 마음은 편하지만 왠지 숨이 좀 막히는 기분도 든다.
지금만큼 블로그며 인터넷이 잘 되어있지 않고,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에는 마음에 드는 가이드북 한 권에 부록으로 딸려 온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그 도시의 중앙역부터 물어물어 찾아갔던 것 같은데 말이다. 지나가다 줄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면 여기 뭐가 있는거냐고 묻기도 하고, 맛있어 보이는 레스토랑이 있으면 타베로그 평점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해볼 생각도 않고 바로 들어가 더듬더듬 주문하고 하고, 뭐 그랬다.
이미 몸도 마음도 편한 방법을알아버린 판에 옛날 얘기를 더 해 봤자 소용은 없겠지만 그래도, 반나절 정도는 아무 생각 없이 하치코가 이끌어주는대로 골목길을 달려 빡빡한 일정 속 예기치 못한 만남을 기대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