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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데이수 Apr 19. 2018

돈까스가 맛있어 봤자라고?

돈키(どんき), 맛집의 프로를 만나다.

고기를 튀긴건데 맛이 없을수가 있나?
돈까스가 맛있어 봤자…


바로 얼마 전, 이 집에 가 보기 전까지만 해도 진심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반성한다.


사실 여기 말고도 맛있다고 소문난 돈까스 집에 안 가본 건 아니다. 관광 가이드북마다 소개되어 있는 긴자바이린(銀座梅林)에도 가 봤고, 철길 바로 아래 위치해 있어 열차소리를 들으며 돈까스를 먹을 수 있는 시게(繫)도 가 봤다.


내 말마따나 고기를 튀겼으니 당연히 맛은 있었지만, 그래도 취향저격이라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돈키에 와 보기 전까지는…



이 집은 메구로역에서 도보 2분 거리에 있다.


(돈카츠 집 치고는) 특이하게 런치영업을 안 하고 오후 4시에 오픈한다. 오픈시간 15분쯤 지나 도착했는데 웬걸, 이미 가게에 손님이 꽉 차 있다.


일본, 특히 도쿄에서는 줄 서는 게 생활이다. 처음에는 줄 서는 게 지루하고 싫었는데, 요즘은 오히려 설렌다.


내 앞으로 4명, 40분 남짓 기다리는 동안 내 뒤로도 몇십명은 더 줄을 섰는데 중간중간 관광객도 눈에 띄지만 츄리닝에 눈꼽도 안 떼고 늦은 점심 먹으러 나온 듯한 동네 주민 비중이 높다. 두 분이 산책이라도 나온 건지 손을 꼭 잡고 들어온 노부부도 몇 커플이나 있었다.


먹기도 전부터, 왠지 이 집은 맛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기다리는 시간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는데, 상당부분 가게 구조가 특이해서다.


1층 전체가 다찌석(주방을 바라보고 앉는 바 좌석)으로, 어림잡아 3~40석 정도 된다. 전체를 커다란 ㄷ자 모양으로 배치하고 가운데를 오픈 키친으로 만들어 놓았다. 주방 한가운데는 커다란 벽시계를 놓고, 전체적으로 조명을 환하게 켜 놓고, 주방 근무자 전원이 같은 복장을 하고 있는 등 묘하게 연극 무대를 연상시키는 공간이다.


그런 주방에서 무려 7명이나 되는 직원들이 각자 자리에 서서 배우처럼 자기 역할에 몰두한다.


누구는 양배추채만 일정한 분량으로 접시에 담고 있고, 누구는 줄곧 튀김대에만 붙어있고, 누구는 줄곧 갓 튀겨나온 돈까스를 썰고만 있고, 누구는 완성된 돈까스에 겨자소스를 곁들여 손님에게 가져다준다.



심지어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를 연상시키는 할아버지도 있다.


예순살은 넘어보이는 백발의 할아버지인데, 손님이 문 열고 들어오면 다짜고짜 '로스? 히레?'라고 묻고는 대기석 아무데나 앉으라고 한다.


어물쩡 아무데나 앉으면서도, 그럼 누가 먼저 왔는지는어떻게 기억하려고 그러나 싶어 내 바로 앞뒤 손님들의 얼굴을 주의깊게 기억해 두었다.


그런데 웬걸, 누가 먼저고 누구랑 왔으며 주문은 뭘 했는지를 하나도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기억해 내고 그 데이터(?)를 바탕으로 주방 이리저리를 돌아다니며 적재적소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튀김대에는 순서대로 뭘 튀기라고 가르쳐주고,

먼저 먹기 시작한 손님부터 밥과 돈지루(돼지고기를 넣은 된장국), 양배추채 등 부족한 걸 채워주고,

혹시 서버가 헷갈려하는 것 같으면 너그럽게 순서를 일깨워주는 등이다.


할아버지 지휘 덕분일까?


무대 위 주연배우들 어느 하나 군더더기 동작 하나 없이 자기 역할을 척척 수행해 낸다. 팀워크도 좋아서 서로 손발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게 신기하기까지 하다. 이 분들의 놀라운 퍼포먼스를 지켜보고 있자니 지루할 틈이 없다.


또 특이한 것, 가게에 음악을 틀지 않는다.


손님들은 고기가 튀겨지는 소리나 바삭한 튀김을 칼로 자르는 소리를 들으며 기다려야 한다. 온갖 시각적, 청각적 자극으로 엄청 배가 고파지던 와중 드디어 주문한 로스까스 정식을 받았다.



튀김옷이 얇고 고기가 두꺼운 스타일이다.

좋은 고기를 썼는지 입에 넣으면 (좋은 의미에서) 돼지고기 특유의 향기가 강하게 느껴진다.


고기가 워낙 커서 돈까스를 '무려' 18조각으로 나눠놓았는데, 윗쪽 조각은 비계와 살코기 비중이 반반, 아래쪽 조각은 전부 살코기다. 비계 부분은 향이 좋고, 살코기 부분은 담백해서 번갈아가며 집어먹으니 밸런스가 딱이다.



맛있는 건 맛있는거니까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운데, 어쨌든 정말 훌륭한 돈까스였다. 한 접시 다 비웠을 때 아니 이걸 벌써 다 먹었다니 조금 더 먹을수는 없나 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이 식당은 하루에 손님을 몇 명이나 받을까?

4시에 오픈해서 처음 자리잡은 손님들이 다 먹고 나갈때까지 얼추 1시간쯤 걸린 것 같다. 애초에 고기에 튀김옷 입히는 것부터 주문 즉시 조리를 하니까 첫 접시 나오는데만 20분은 걸렸을 것이다.


내가 다 먹고 나가는 5시 시점부터는 본격적으로 줄이 길어지기 시작해 가게 안 15석 남짓한 웨이팅석이 꽉 차고 가게 밖으로도 길게 줄이 늘어섰으니까 그 사람들 다 먹고 나가는 것까지 생각하면 몇백명은 될 것이다.


나는 몇백명 중 한 명일뿐이지만, 그래도 시각과 청각과 미각으로 돈까스를 둘러싼 총체적인 경험을 했고 가게 문 열고 들어가서부터 계산하고 나올때까지 줄곧 세심한 배려를 받아 편안하게 식사할 수 있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다 그냥 사소한 포인트들이다.


내 웨이팅 순서와 주문을 정확하게 기억해 주었다든지, 양배추채가 떨어지려고 할 때쯤 바로 채워넣어 주었다든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데도 가게가 청결한 느낌이었다든지, 당연하지만 제일 중요한, 음식이 정말 맛있었다든지 하는 정도다.


돈까스 치고 가격이 꽤 비싸다고 생각했지만(한화로 만구천원 정도) 전혀 망설임 없이 지불하고 나왔을뿐 아니라 다음에 또 와서 먹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어설프게 맛집이라고 소문 났다가 금방 초심을 잃어버려 단골 손님을 잃어버리고 마는 식당이 많은 요즘인데, 이 집처럼 프로페셔널한 가게들이 더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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