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을 기다려 일 주일, 도쿄의 하나미를 소개합니다.
그놈의 벚꽃전선, 겨우내 TV만 켜면 봐서 지겨울 지경이었다.
지역에 따라 개화 시기에 거의 세 달 정도는 편차가 있기도 하고, 그 개화 시기라는 것도 직전 날씨에 따라 미묘하게 변하기 떄문에 사실 예측하기조차 쉽지 않다.
그래도 몇 달 전부터 여러 정보를 동원해 예측을 해 보고, 전문가를 불러 와 이 예측이 얼마나 정확할지를 이리저리 대 보고, 작년 사진을 꺼내 와 도쿄라면 역시 이 장소가 하나미 하기에 좋지요 라고 정보를 공유하고, 심지어 패널들을 불러 벚꽃이 언제 필까요 벚꽃은 정말 좋아요 라고 하릴없는 토의를 하기까지.
도대체 이 나라 사람들에게 벚꽃이란 뭔가, 라는 의문이 가시지 않던 중에 드디어, 도쿄에 와서 첫 벚꽃주간을 맞았다.
아름다웠던 풍경을 추억하면서, 지극히 초짜를 위한 벚꽃놀이 가이드를 써 본다.
사실 제일 중요한 건 언제 가느냐다.
벚꽃은 피는 것도 순식간, 지는 것도 순식간이라 만개는 딱 일 주일. 골든타임이 지나고 나면 강물 위에 분홍 카펫처럼 꽃잎이 흐드러지고는 순식간에 꽃은 흔적만 남고 새 잎이 돋아 이 나무가 벚꽃나무였는지도 헷갈리게 된다.
하지만 벚꽃이 언제 필지는 나름 정확하기로 소문난 일본 기상 캐스터들도 모르는 부분이니 일단 넘어가자.
그렇다면 다음 질문, 어디로 갈 것인가?
https://sp.jorudan.co.jp/hanami/rank_tokyo.html
http://tg.tripadvisor.jp/news/advice/tokyo100-sakura/
몇 가지 링크를 참고하면 좋다.
아래 트립어드바이저 페이지에는 도쿄 도내의 하나미 스팟이 무려 100개나 정리되어 있다.
사실 벚꽃 피는 계절이 되면 꼭 유명한 스팟 아니더라도 소담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벚꽃나무들이 많아 길 가다가 멈춰 잠깐 멍 때리고 가는 일이 잦다. 이런 우연은 우연대로 두고, 일부러 찾아갈 만한 곳도 이렇게나 많다.
잘 알려진 하나미 스팟일수록 규율이 엄격하니 사전에 잘 확인해보고 갈 일이다.
예를 들어, 치도리가후치에서는 돗자리를 깔고 놀 수 없다. 반면 우에노공원이나 이노카시라공원은 하나미 철이 되면 공원 전체가 블루시트(파란색 천막 재질로 된 돗자리. 우리나라에 은박 돗자리가 있다면 일본에는 블루시트가 있다)로 도배가 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벚꽃나무 바로 아래 좋은 자리를 맡기 위해 아침 일찍, 심지어 새벽부터 공원 앞에서 노숙하는 경우도 있다.
어느 공원에 갈지 정한다고 끝난 게 아니다.
보통 하나미라고 하면 벚꽃 아래 돗자리를 깔아놓고 도시락도 까 먹고, 맥주도 한 잔 하는 걸 가리킨다.
어디에 앉아야 할까.
연인이나 친구들과 소규모로 가는 거라면 부담이 적을 수 있지만, 이맘때쯤 일본의 신입사원 공채 시즌과 맞물려 회사 야유회로 가는 하나미라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리 잡는 일 자체가 절체절명의 임무일 수 있기 때문에...
https://xn--5ck1a9848cnul.com/3197
이런 가이드가 등장하기에 이른다.
간단히 소개하면, [하나미 자리잡기의 A to Z를 알려주마!]라는 내용이다.
자리 잡을 때 고려해야 할 포인트는,
- 만개한 벚꽃나무 바로 아래일 것
- 화장실과 쓰레기 버리는 곳이 가까울 것
- (밤까지 노는 경우에) 가로등이 가까울 것 등이다.
심사숙고 끝에 적절한 자리를 찾았다면, 먼저 준비해 온 블루시트를 깔아놓는다. 시트 여러개와 청테이프를 준비해서 여러 개 시트를 하나로 붙여 상당한 공간을 맡아놓는 경우도 있다.
이 떄 상상할 수 있는 준비물은 글쎄, 무한대다.
예를 들어 위 사진처럼 골판지를 활용한 일회용 테이블이 있다. 진짜 별걸 다 판다 싶은데, 하나미 시즌 공원에 가면 이런 걸 사다 쓰는 사람이 진짜 있다. 사진에서 검게 보이는 홈에 캔맥주를 꽂아놓고 먹으면 되니 편리하긴 할테지만...
이맘때쯤 다이소에서는 하나미 전용 일회용 식기를,
각종 맥주회사에서는 하나미 한정 패키지를 판매하는 등 일본의 온갖 소비재 회사들이 대목을 맞아 들썩거리는 만큼, 미리 정보를 잘 수집했다가 준비하기에 따라서 당일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있다.
(맛이야 별 차이 없겠지만, 같은 음식이라도 벚꽃 그려진 접시에 먹는거랑 아닌거랑 기분은 좀 다를 것이다.)
어쨌든 지금부터 중요한 것, 절대 자리를 비워서는 안 된다.
하나미 시즌이 되면 공원 곳곳에 순찰이 늘기 때문에 주인 없는 시트는 즉각 회수된다. 애초에 주변 사람에게 가급적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하는 게 일본인들의 특징이기 떄문에, 자리를 맡으려면 최소한 누군가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는 룰 정도는 제대로 지키는 것 같다.
보통 아침부터 자리를 맡았다가 저녁에 하나미를 하니까, 번갈아가면서 화장실에 갈 수 있도록 두 명씩 한 조를 짜서 2~3시간마다 교대를 해 줘야 한다.
3월 말, 봄이라고는 해도 하루종일 바깥공기를 마시다보면 아무래도 좀 추워진다.
그리고 일본은 화분증(花粉症)이라고 불리는 꽃가루 알레르기로 고생하는 사람이 많다. 조금 유난이다 싶을때도 있지만, 뭐 공원이 많아서 그런가 공기중에 꽃가루가 정말 많기는 한 것 같다. 화분증이 발현되면 눈 충혈,콧물, 재채기 등 번거로운 알레르기 증상이 나타나기 떄문에 꽃가루에 조금이라도 반응하는 사람이라면 휴지와 마스크도 챙기는 게 좋겠다.
이렇게 어찌어찌 준비를 잘 해서 좋은 자리를 선점했다면, 그 다음은 뭐 말할 것도 없다.
직접 보기 전에는 벚꽃이 뭐 특별할 게 있나 정도로 시니컬하게 생각했는데 막상 벚꽃나무 아래서 밥도 먹고 술도 먹어보니 뭘 먹어도 기분이 두둥실 들뜨고 너무너무 맛있다. 눈 깜빡 하면 시간이 한 시간씩 흘러 있을 정도로 어딘지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되어버리는 점이 좋다.
그래서인지 보통 공공장소에서 시끄럽게 떠들지 않는 일본 사람들도 하나미 시즌이 되면 공원 곳곳에서 술 잔뜩 먹고 고성방가를 하고 난리다.
슬슬 마무리를 하자면, 하나미를 즐긴 후에도 참고하면 좋을 팁이 있다.
인기있는 스팟은 자리 잡기가 워낙 힘들기 때문에,
밤 아주 늦은 시간만 아니라면 언제든 그 자리를 '승계'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이런 그룹은 보통 저녁 7~8시는 되어서 어슬렁어슬렁 나타나는데, 대부분 준비물 같은 건 안 들고 있다
치우기 귀찮다는 니즈와, 준비 못 했지만 하나미는 즐기고 싶다는 니즈가 만나면 귀가길이 순조롭다.
블루시트, 채 다 못 먹은 술과 음식, 그리고 어마어마한 쓰레기까지 다음 팀에게 넘겨주고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신카이 마코토의 초속 3센티미터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 보기 전엔 몰랐는데, 벚꽃이 지는 속도가 초속 3센티미터라는 데서 제목을 따왔다고 한다.
영화은 어린 시절 마음을 다해 좋아했던, 하지만 어른의 눈으로 보면 결말이 정해져 있어 허무하고 아름다운, 그런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마치 첫사랑처럼 쏜살같이 지나가 버리는 벚꽃 시즌이 조금은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동안만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맘껏 누리고 나면 그 허무함까지도 추억으로 남을 수 있겠지?
사실 올해는 본격적으로 하나미를 준비할 정신이 없어서 제3자의 눈으로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구경만 했지만, 내년에는 나도 겨우내 뉴스를 보며 개화 시기도 알아내고 유명한 스팟과 준비물도 잘 마련해 뒀다가 일 년에 일 주일, 이 도시 사람들의 삶을 한층 풍요롭게 해 주는 핑크빛 하늘을 제대로 즐겨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