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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데이수 Jul 08. 2018

야네센, 시상이 떠오르는 골목

20세기 초반 일본의 정서와 함께 느긋한 오후 나절을

야나카, 네즈, 센다기 세 개 동네의 첫 글자를 따서 야네센 이라고 한다. 느긋하게 걸어서 한시간 반 남짓의 산책로로, 도쿄 여행의 필수 코스라는 우에노 공원에서 가까운데도 생각보다 관광객 수가 많지 않아 조용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다.


네즈 역에 내리면 좀 얼떨떨하다. 도심부에 인접해있으면서도, 도쿄 도심과는 어딘지 다른 풍경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몇 년이나 그 자리에 있었는지 모를 목조건물이 한 집 건너 한 집 꼴로 등장하고, 길가에 늘어선 가게들도 지극히 소박하지만 오랜 세월 쌓아 온 내공이 느껴진다. 온갖 색깔과 모양의 우산만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곳, 원두를 주문하면 그 자리에서 로스팅부터 시작하는 커피 전문점, <고독한 미식가>의 고로상이 테미야게(手土産, 누군가를 방문할 때 인사차 들고가는 선물)로 사갈 것만 같은 센베이 가게...


센다기역 인근의 원두 전문점 야나카 커피. 원두를 주문하면 이 저울에 달아준다.


이 동네에서 이렇다할 관광 스팟을 찾기는 어렵지만, 굳이 하나 꼽아보자면 네즈신사(根津神社)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도쿄 자체가 굉장히 젊은 도시다. 17세기 초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만들기 전만해도 글쎄, 교토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역사의 변방에 가까웠다. 그러니 도쿄에서 전통과 역사가 있는 무언가를 찾으려고 하면 굉장히 막막해진다. 그래서 다들 사람 많을 걸 알면서도 (그나마 전통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아사쿠사에 한 번쯤 가 보는 것일테다.


그런데 네즈신사는 자그만치 1900년 전에 처음 지어졌다고 한다. 물론 그 오랜 세월 건물이 유지되기는 어렵다보니, 건물 자체는 여러번에 걸쳐 재건이 되었던 모양. 어쨌든 도쿄에서, 나아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신사 중 하나라는 데 의의가 있다.


아쉽게도 올해는 타이밍을 맞추지 못했지만, 4~5월이 되면 50종이나 되는 철쭉이 신사 경내에 흐드러져 제법 큰 규모의 마츠리(祭り, 일본의 전통 축제)도 열린다고 한다.


네즈신사로 들어가는 입구. 신사 경내가 넓지 않아서 금방 돌아볼 수 있다.


바싹 관광객 기합을 넣고 네즈신사를 구경하고 나면 사실, 어디를 꼭 가봐야 한다는 건 없다. 그냥 네즈에서 센다기까지 이어지는 길을 슬렁슬렁 걸으며 오래된 목조주택을 구경하고, 생활의 흔적이 물씬 묻어나는 동네 가게들을 구경하며 슬렁슬렁 산책하는 정도랄까.


개인적으로 도쿄 도심을 굉장히 좋아한다. 도시의 혈관처럼 시원하게 뻗어있는 수도 고속도로, 숨막히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스카이라인, 어딜 가도 신경써서 계절마다 다른 느낌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가로수와 정원,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하게 정리된 보도, 클락션을 거의 울리지 않고 가게 안 음악이 밖에까지 들리지 않게 해 놓아서 조용한 거리까지. (조용한 거리라는 부분은, 신주쿠, 시부야, 아키하바라 등 일부 지역에는 해당되지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도시 전체가 새 것처럼만 느껴지는 이 곳 도쿄에서, 잠시 한 걸음 물러나 과거로 돌아간 듯 소박하고 평화로운 풍경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야네센에서의 산책을 특히 추천한다.


이제는 서울에서도 찾아보기 어렵게 된 동네 문구점. 문구점 답게 온갖 잡동사니를 취급하고 있다.


덧붙이자면, 이 곳은 나쓰메 소세키를 비롯한 일본의 문학가들이 사랑하던 동네였다고. 일부 작가들의 생가를 기념관으로 꾸며놓기도 했다는데, 필자는 굳이 거기까지 찾아가지는 않았지만 평소 일본 문학에 관심이 있었다면 체크해볼 만 할 것 같다.


그리고,


여행의 시작과 끝은 역시 맛있는 음식을 먹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어렵게 시간을 내서 야네센에 왔다면 일본에서만 먹을 수 있는 맛있는 음식을 먹고 가야 할 것. 그런 의미에서 이 곳 한테이(はん停)에서의 쿠시카츠 코스를 추천해본다.


메이지 시대에 지어져, 건물 자체가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곳. 한테이는 1970년부터 이 곳에서 쿠시카츠(꼬치튀김)을 팔고 있다.


쿠시카츠는 각종 재료를 꼬치에 꿰어 튀겨파는 음식. 이런 걸 굳이 찾아가서 먹어야 해?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일본에서도 맛있는 튀김 먹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은 튀김옷이 두껍고 식감이 바삭바삭한 걸 쳐주는 것 같고, 내가 일본에서 맛있다고 생각한 튀김은 튀김옷이 얇으면서도 식감이 바삭바삭하고 무엇보다 식재료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이 곳에서 경험한 튀김 역시, 제철 식재료의 향기를 그대로 담아냈다는 점에서 아주 훌륭했다.



여기는 주문방식이 조금 특이하다. 처음에는 반드시 기본 코스를 주문해야 한다. 코스를 다 먹고 난 다음에는 마음에 드는 재료를 추가 주문하거나, 2차 또는 3차 코스를 주문할 수 있다.


코스에서는 갓 튀긴 꼬치를 2~3개씩 가져다주고(기억이 좀 희미하지만 총 3~4번 정도 무언가를 가져다줬던 것 같다), 그때마다 어떤 재료를 사용했는지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다만 설명이 전부 일본어여서 알아들을 수 없는 게 조금 괴로웠다. 세상에는 왜 이렇게 식재료가 많아서 들을때마다 새로운 게 등장하는지!



또 여기는 나마비루(生ビール)가 없다. 맥주를 마시고 싶다면 병으로 주문해야 한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오래된 가게일수록 나마비루를 잘 취급하지 않는 것 같다. 나마가 아닌 건 좀 아쉽지만, 시원한 병맥주를 유리컵에 따라 튀김에 곁들여 먹는 맛도 나쁘지 않다. 뭐 어쨌든 맥주 아닌가.




작년 한 해 일본을 방문한 관광객 수가 2,800만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2020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아베 정부는 관광객을 적극적으로 유치해 경제효과를 거두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과연 관광객들이 몰리는 일부 스팟(교토의 키요미즈데라, 도쿄의 긴자 등)은 특색을 잃어가고 있지만, 그래도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이 곳 야네센처럼 특색있는 장소들이 많이 남아있는 것 같다. 죄다 가보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정도다.


이 곳도 언젠가는 한국의 인사동이나 가로수길처럼 프랜차이즈가 점령해버리고 말려나. 다들 보라고 블로그에 포스팅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인디언들이 사냥으로 생활을 유지하면서도 주변 생태계를 어지럽히지 않는 법. 이들은 식량이 부족할 때에 딱 필요한 만큼의 동물만 사냥하고, 사냥을 유희로 여기지는 않는다고 한다. 산업화 시대 우리 관심사가 오직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돈 버는 데 있었다면, 최근에는 삶의 질을 높이자는 것으로 논의가 옮겨갔다.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고,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여행을 다니는 것 역시 그 연장선상이다.


그런데 산업화 시대 우리가 '더 많이'에만 집착한 나머지 (극단적으로는) 아동노동마저 눈 감을 만큼 도덕성을 잃어갔던 것처럼, 최근 우리가 더 잘 살아보자고 하는 행동들이 그 정도가 지나쳐 결국에는 우리의 즐길거리들을 다 말려죽이고 있는 건 아닐까. 관광공해, 젠트리피케이션, 이런 말들이 떠오른다.


그러니, 적당히. 쉽지 않지만 그 곳 나름대로의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는 선에서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디까지나 내가 좋아하는 이 동네 야네센이 아무쪼록 앞으로도 이 모습 그대로 남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덧붙여 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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