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생의 해외살이 : 낡은 관습을 뻥 차 버릴 용기
이번 연말연시에도 한국에 다녀왔다.
올해 일본의 연말연시 연휴는 12월28일(토) 부터 1월5일(일) 까지 무려 9일이나 되었다. 그 중 하루이틀은 대형마트나 백화점이 쉬고, 동네 식당은 제각기 가게 앞에 안내문을 내걸고 쉰다. 한국에서 맞는 연휴는 무조건 좋은 거지만, 가족도 친구도 없는 해외에서 혼자 맞는 연휴는 왠지 쓸쓸한 의미다. 그래서 몇 개월 전부터 한국행 비행기표를 끊어뒀다가, 퇴근하자마자 냅다 공항으로 내달렸다.
1월1일 아침에 가족들과 떡국을 먹었다.
올해도 이렇게 한 살 더 먹는구나, 새해 복 많이 받아라, 하는 의례적인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좀 생소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산타의 존재를 굳게 믿다가 산타가 없다는 걸 알아버린 대여섯살 꼬마의 마음 같았는데, 그간 별 의심없이 내 삶에 녹아있던 떡국 = 한 살 의 공식이 갑자기 무척 생소하게 느껴진 것이다. 내가 지금 일본에 있었더라면 떡국이 아니라 토시코시소바(年越しそば)를 먹었겠지, 그렇다면 새해 첫 날엔 꼭 떡국을 먹어야 할까? 라는 의문이 떠올랐다.
* 토시코시소바(年越しそば)는 12월31일 밤에 한 해를 떠나보내는 의미로 먹는 소바를 가리키는 말
필자는 1990년생이다. 요즘 여기서기서 '90년대생이 온다'고 난리인데, 운 좋게 90년대 쪽에 발을 걸쳤다.
회사 분들과 이야기하다가 가끔 '90년대생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화제가 나올 때가 있다. 눈치를 안 봐도 너무 안 본단다. 나도 '낀 세대'인지라 대화 속에 등장하는 '90년대생'이 왜 어려운지 이해가 안 되는 바가 아니라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다. 그러다 '누구누구씨도 90년대생 아냐?'라는 질문을 받으면, 가면이 벗겨진 후의 오페라의 유령처럼 매우 취약한 상태가 되어 후닥닥 화제를 돌린다.
그렇게 오락가락 하는 나지만, 며칠 전 떡국과 토시코시소바 사이에서 갸우뚱하며, 왜 90년대생이 그간 굳어져 온 사회적 관습을 그대로 수용하기 어려워하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무조건 'Yes'를 외치기에 우리는 어려서부터 'No'를 보고 경험할 기회가 많았다.
철썩같이 믿고 따라 마땅할 사회적 관습을 생소하게 느낄 수 있는 이유,
우리가 어려서부터 한국 밖 세상을 경험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 아닐까.
우리 부모님은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다녀오셨다. 두 분이 결혼하신 1989년은 해외여행이 막 자유화 된 해다. 지금이야 국내로 신혼여행 가는 게 영 어색하게 느껴지지만, 그때만 해도 제주도까지 비행기 타고 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괜찮았던 때다.
다음 해인 1990년에 내가 태어났다. 어릴 적 아주 유복하게 자라지는 않았지만, 이모가 여행사를 하신 덕에 패키지 여행은 여러 번 다녀왔다. 중국 하이난이나 괌 같은 여행지에 단체 관광버스를 타고 돌아다니며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어색한 표정으로 사진 찍히던 게 기억에 남는다.
대학에 입학한 해에는 학교 지원을 받아 한 달 간 유럽에 어학연수를 다녀왔다. 어학연수 기간이 끝나고는 열흘 정도 배낭여행을 했다. 대학 동기들이랑 기숙사에서 부대끼며 지내다가 홀로 유럽땅을 누벼야 한다는 게 정말 무서웠던 기억이다. 스마트폰도 없을 때라 가이드북에 딸려 온 지도 한 장 들고 더듬더듬 관광지를 순회했고, 어리숙했던 것 치고 천만다행으로 좋은 사람들을 만나 무사히 한국에 돌아왔다.
딱 일 년 뒤에는 교환학생으로 다시 유럽땅을 밟았다. 1년 간 2개국에서 온갖 나라 출신의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놀다보니 '나랑 놀래?'를 'Will you play with me?'라고 옮기던 수준에서 하고싶은 말의 반 정도는 전달할 수 있는 수준으로 영어실력이 꽤나 늘어서 돌아왔다.
그 후 몇 년이 지난 지금은 아예 일본에 나와 살며 일을 하게 되었다.
제주도로 신혼여행 가는 길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서 기뻐했던, 그리고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첫째를 가진 걸 알게 된 우리 부모님. 두 분은 당신들 첫째 딸이 이렇게나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살게 될 줄 알았을까?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와서, 새해 첫 날 꼭 떡국을 먹어야만 할까?
이 경우에는 무리해서 해외살이 라는 주제를 끌어들이지 않고도 어렵지 않게 모두가 공감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떡국을 안 먹는다고 큰일날 건 없다. 그래도 새해 첫 날 가족끼리 밥상에 둘러앉아 떡국을 나눠먹을 빌미(?)가 된다. 그걸로 따스함을 느낄 수 있다면 충분하다.
하지만 세상에는 떡국보다 무겁고 버거운 관습들이 많이 있다 : 아홉수에 결혼해서는 안 된다, 윤달에 결혼하면 재수가 없다, 아이 이름에 돌림자를 써야 한다 또는 집안 어른이 지어줘야 한다 등등.
이런 이야기들을 듣고 있으면 대번에 반감이 든다. 아아니, 아홉수 같은 말을 믿는 나라가 한국 말고 또 있던가. 사주나 돌림자를 따르지 않으면 큰일이 난다는데, 세상에는 사주에 신경쓰지 않고도 잘 사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은가. 이런 궁금증이 피어오른다.
결국 해외살이로 시야가 넓어진 만큼, 낡은 관습을 뻥 차버릴 용기가 생기는 게 아닐까. 아홉수, 뻥. 사주, 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