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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밤산책 Jun 14. 2023

가장 먼저 번데기가 되지 않아도 괜찮아.

  완연한 봄이라는 느낌이 들었을 무렵, 배추흰나비 알과 케일 화분이 세트로 들어있다는 교구를 구입했다. 그 덕분에 케일 화분에서 배추흰나비 애벌레가 무럭무럭 자라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애벌레가 참 많았다. 너무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는 애벌레도 있고 이미 알에서 깨어난 상태로 도착해서 꽤 잘 보일만큼 자라있는 애벌레도 있었다. 여기저기 애벌레들이 붙어 있는 것을 구경하면서 며칠이 지났다. 이 모든 애벌레들이 나비가 될지 의구심을 품으면서도 은근한 기대감에 들떠 자꾸만 케일 화분을 보게 되었다.

  꽤 여러 마리가 있었던 것 같은데 며칠이 지나고 보니 두, 세 마리 밖에 보이지 않았다. 후기를 보면 어떤 사람들은 10마리 가까이 보인다고 한 경우도 있었고 애벌레가 다 죽은 것 같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두, 세 마리 정도면 적당하지 싶었다. 마음 속으로 첫째, 둘째, 셋째라고 이름 붙이며 애벌레들이 자라는 것을 계속 지켜보았다.

  애벌레들은 하룻밤 사이에 꽤 많이 자라서 며칠 사이에 깜짝 놀랄 정도로 자라있었다. 그리고 애벌레가 이렇게 크다고? 설마 더 자라는건가? 싶은 생각이 들 무렵, 가장 큰 애벌레(첫째)가 사라지고 케일 기둥에 실을 묶은 번데기 한 마리가 보였다. 가장 빨리 알에서 깨어나 누구보다 무럭무럭 자라더니 이렇게 일찌감치 번데기가 되다니 너무도 신기하고 기특했다. 이쯤 되니, 나머지 애벌레들이 보이지 않아도 그리 걱정이 되지 않고 첫 번째 번데기에 가장 큰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며칠이 지났다. 신기하게도 나머지 애벌레 두 마리 역시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는 번데기로 탈바꿈해있었다. 실은 어디서 뽑아냈는지 야무지게 몸을 묶어서 한 마리는 커다란 케일 잎 뒤에 자리를 잡았고 가장 마지막으로 번데기가 된 셋째는 관찰을 위해 설치한 투명 방충망의 가장 윗 부분에 자리를 잡았다.

  모두가 번데기로 변하고 밖에서는 관찰할 수 없는 비밀스런 성장 과정을 기다리는 동안, 케일 화분은 시들어가고 이러다 아무도 나비로 변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슬슬 고개를 들고 있었다. 무심한 듯 한 번씩 힐끔거리고는 번데기의 색깔이 어떻게 되어야 정상인건지 검색창에 몇 번이나 검색을 해보면서 시간이 지나갔다.

  그렇게 한 일주일 정도 지나고 있던 어느 아침, 방충망 안에서 무언가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나비였다. 배추흰나비. 너무 반갑고 신기해서 사진을 찍고 계속해서 구경을 하다가 다른 번데기들이 위험하지 않게 조심스레 나오도록 해서 바깥 세상으로 보내주었다. 그리고 파란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나비에게 마음 속으로 몇 번이나 인사를 전했다. 내가 한 거라고는 케일 화분에 물을 조금씩 주고, 바람이 잘 통하는지 봐주며 기다린 것 뿐인데 알 수 없는 성취감에 마음이 뿌듯했다.

  그런데 첫 번째 나비를 날려보내고 다시 케일 화분을 보았을 때, 어딘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 가장 먼저 번데기가 되었던 첫째는 여전히 번데기인 상태로 케일 화분 가운데에 고정되어 있었다. 방금 날려보낸 그 나비는 케일 잎 뒤에 자리를 잡았던 둘째였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방충망 위쪽에 자리를 잡았던 셋째 번데기가 나비로 탈바꿈하여 한 번 더 우리를 놀라게 했다. 우리는 역시 기뻐하고 반가워하며 창 밖으로 나비를 날려주었다.

  그렇게 우리의 나비 키우기는 마무리 되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케일 화분이 모두 시들어버리고 날씨가 점차 더워지는 그 시간 동안, 가장 먼저 번데기가 되었던 첫째는 나비가 되지 못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방충망과 케일 화분을 정리했다. 본격적인 배추흰나비 키우기는 마무리 되었지만, 여전히 케일 기둥에 몸을 묶은 채 버티고 있는 번데기를 흙으로 보내주기는 너무 아쉬워서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조용히 두고 좀 더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3주 정도가 지났다. 이젠 케일 화분이 너무 시들어서 더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첫째가 왜 나비가 되지 못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첫째는 나비가 되지 못했고 그게 참 안타까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일 자체가 나에게 어떤 교훈을 남기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첫째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지만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나에게는 하나의 희망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너무도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느리게 자라던 둘째와 가장 늦게 알에서 깨어나 눈에 잘 띄지 않던 셋째가 나비가 되었다는 그 사실에 '천천히 가도 괜찮아.'라는 노래 가사가 떠올랐다. 가장 먼저 가능성을 보여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누구보다 빠르게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런 말들이 생각났다. 번데기 안에서 미쳐 펴내지 못한 날개의 무늬가 투명하게 비치는 그 상태로 남아 있는게 안타까우면서도 한 편으로는 그 모습에서 어떤 교훈을 발견하고 싶었던걸까. 나도 모르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모두가 빠르게 달려가는데 왜인지도 모르면서 거기에 맞춰 달리는게 버겁다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배추흰나비 키우기는 예상치 못한 결말을 남기고 마무리 되었다.

  천천히 가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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