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네시, 우렁 할머니를 따라나서다

참외딱지

by 순디기

여든이 넘은 노모의 몸에는 지워지지 않는 시계가 박혀 있는 모양이다. 시골에서 평생 농사를 지으며 다져온 몸의 성실함은 세월조차 이길 수 없는 것일까. 새벽 네 시. 잠에서 깨어나신 엄마는 자고 있는 딸에게 두런두런 혼잣말처럼 낮은 이야기를 건네시더니, 이내 부스럭부스럭 옷을 챙겨 입으신다. 마스크까지 야무지게 쓰시고 새벽 운동 나갈 채비를 하시는 엄마.


나는 뜨끈한 온돌 바닥에 자석처럼 들러붙은 몸을 억지로 떼어내 본다. 이제 일주일 남짓 지나면 다시 나의 본업으로 돌아가야 한다. 짧은 순간이라도 엄마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잠시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욕심에 눈을 비비며 따라나선다.


새벽 운동이라 해봐야 시골 동네 논두렁길을 한 바퀴 쓰윽 돌고 오는 것이 전부. 하지만 무릎과 발목이 아프고 기력이 쇠한 엄마에게는 이마저도 벅찬 여정이다. 내가 혼자 걸으면 20분이면 충분할 길을, 엄마는 애를 써서 걸어도 한 시간은 족히 걸으셔야 마칠 수 있다.


해가 뜨기 직전, 검푸른 하늘 아래 흙 내음과 풀 내음이 가득한 시골길을 걷는다. 참외 농사가 한창인 이곳은 비닐하우스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새벽빛을 받은 하얀 비닐하우스들이 마치 눈밭처럼 보여 나름의 운치와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인적 없는 논두렁을 지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갑자기 엄마의 발걸음이 멈춘다. "오늘 이 집에 참외 땄네!"

엄마는 앞장서서 동네 아지매네 비닐하우스로 성큼 들어가신다. 주인도 없는 비닐하우스에는 반들반들하게 잘생긴 참외들이 황금빛을 뿜어내며 상자에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


"또 참외 따러 들어갔는갑네."


엄마는 익숙한 듯 하우스 구석을 뒤적여 '참외 딱지(상품 표시용 스티커)'를 찾아오신다. 엄마 한 장, 나 한 장. 우리는 참외 딱지 뭉치를 나눠 들고 포장된 참외 하나하나에 정성스레 스티커를 붙이기 시작했다.


작업이 끝날 때까지도 참외 주인 아지매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우리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곳을 유유히 빠져나왔다.


우렁각시가 따로 없다. 아니, '우렁 할머니' 일세. 내가 참외딱지를 붙이고 왔네 어쨌네 생색낼 필요도 없다. 그저 일손이 필요한 곳에 작은 도움을 보탤 수 있다면 내 일처럼 몸을 움직인다.


요즘 세대의 눈에는 '오지랖'이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손익을 따지는 계산이 없다. 그저 작은 도움이 되고자 하는 순수함, 아니, 몸에 배어버린 선한 습관만 있을 뿐이다. 이런 우렁 할머니들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시골이 있어 참 다행이고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앞서가는 엄마의 굽은 등을 보며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나는 지금 어느 누군가에게 따뜻한 우렁 중년인가? 먼훗날 나는 엄마처럼 우렁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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