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써니플래닛 Jan 01. 2024

12월 31일에 내가 하는 일

한 해의 연말 정산



내가 매년 한 해의 마지막 날에 하는 일이 있다.

바로 내 맘대로 연말정산하기!

나는 평소 핸드폰 캘린더에 이런저런 일을 많이 기록해 둔다. 바로 그런 기록들을 모아 정리하는 것이다.


1월 1일부터 달력을 샅샅이 살펴보며 내가 남겨둔 기록을 바탕으로 메모장에 글을 써 내려간다. 각 월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간단하게 적는데, 이게 꽤 재미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1월
- CGV에서 남편과 영화 '아바타' 봄(1/1)
- 카페 '79 파운드'에서 초코 크로플을 처음 먹고 반함(1/3)
- 남편이 만들어준 올해의 첫 호떡!(1/6)
- 카페에서 이번 주 수업 준비를 뚝딱뚝딱해 냄! 비싼 커피 값이 아깝지 않음!!(1/7)
- 오랜만에 오일파스텔로 그림 그리기(1/8)
- 새 네스프레소 커피머신이 도착!(1/11)
-여의도에 맥스 달튼 전 보러 감(1/16)



이렇게 적다 보면 시간의 흐름은 일정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어떤 일은 까마득한 옛날 같은 느낌이지만 불과 몇 주 전에 있었던 일이기도 하고, 마치 지난주처럼 생생한 일이 실제로는 몇 달 전 일이기도 하다.


12월 31일엔 적당히 한적한 카페에 가서 편안한 자리를 골라잡고 앉아.

"어머, 어머!" 하는 호들갑스러운 감탄사를 연발하며, 한 해를 돌아본다.


이런 기록을 들춰보다 보면, 기록하는 사람이 우위를 점한다는 생각도 곧잘 한다. 나는 마음만 먹는다면 기록하지 않는 자의 기억을 마음대로 재구성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난 정직한 기록자 최대한 진실되게 이야기한다.)


한 해의 기록을 나만 알기는 아쉬워 주변 사람들의 기억까지 되살리곤 하는데, 요 몇 년 간, 그 혜택을 받는 대상은 주로 남편이었다.


나는 핸드폰 캘린더를 들여다보며 바쁘게 글을 옮겨 적다가 이따금씩  옆에 앉은 남편의 어깨를 찰싹찰싹 때리며 말한다.


" 작년 이맘때 우리가 어디서 뭐 했는지 알아?"

"우리 여행 몇 월에 갔는지 알아?"

"그때 당신이 이런 말을 해서 내가 얼마나 화를 냈는지 기억나?(... 기억 안 나...?)"

"푸하하.. 작년에 당신이 한 농담인데 기억나? 지금 생각해도 웃기다! 큭큭.."


이 기록들을 통해 나는 남편에게 다 지나가고 있는 올해를 소개하는 안내자를 자처한다. 만약 남편이 내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해도, 정답을 말해도, 모두 신난다. 잊고 있었던 기억을 되살려준 뿌듯함, 그 시간을 함께 보낸 이와의 연대감. 어느 쪽이든 좋다.


가끔씩 불친절한 메모는 그 의미가 아리송해서 탐정처럼 추적에 들어간다.


"우리 이날 중식을 먹었다는데. 가지튀김은 별로였다고 하네?? 여기가 어디지?"

"언제라고? 2월 26일?"


결국 우린 가계부를 뒤지고, 카드결제 내역까지 샅샅이 보며, 결국 그 음식점을 찾아냈다.


끝내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일들도 있는데,

예를 들자면, 내가 아이콘이나 모호한 단어 1개 등으로 표시를 해둔 일 같은 것들이다.

그때의 나는 미래의 내가 이 표식을 못 알아볼 리가 없다고 생각했나 보지만, 지금의 난 그 의중을 전혀 모르겠다.


그날 일기를 살펴봐도. 카드결제 내역을 뒤져보아도 의미를 알 수 없는 하트 아이콘들은 대체 무엇가!! 한참 들여다보다가 '기분이 좋았나 본데.. 아마 이런 일이 아니었을까?' 하고 넘겼다. 메모를 꼼꼼하게 해야 하는 이유다.


얼레벌레 지나가버린 1년 같지만,  이런 기록들을 보고 있자면, 1년이 얼마나 애틋하게 느껴지는지. 12월이면 어쩐지 아쉬움을 넘어선 허무함 마저 느끼는 사람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활동이다.


내년에도 12월 31일엔 꼭 이런 시간을 갖겠다고.

1년 동안 메모를 게을리하지 않겠다고 다짐해 본다.

작가의 이전글 하나의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