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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은 Jan 24. 2022

귤을 안 먹은지 오래다

1인 가구와 귤

어릴 적엔 양손 가득했다가

어른이 되면 어느새 사라져 버리는 것들이 있다.

여러 범주가 있겠지만, 개 중 하나는 귤이다.


“요즘 과일은 먹고 사니?”

“과일? 냉동 과일만 먹고 있지 뭐. 아침에 스무디로 갈아먹을 때도 있고, 요거트랑 먹을 때도 있고”


“그런 거 말고 생과일을 먹어야지.

귤 같은 거라도 사 먹어, 요즘 싸잖아”

“그래? 귤이 얼마더라.”


“잘 먹고 다녀야지. 그러다 고독사 하는 거야.”

“알았어. 귤 안 먹은 지 진짜 오래됐네.”


“귤 좀 갖다 줄까?”

“아니야, 내가 사 먹을게”


엄마와 주고받는 싱거운 대화는 마무리됐지만 귤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베란다에 쌓여있는 주황색 열매들. 겉에 있는 흰색 껍질을 떼어먹으면 그렇게 혼이 났는데. 실제로 헤스피리딘이라는 피토케미컬이 들어있다고 한다. (헤스피리딘과 피토케미컬 둘 다 모르겠지만) 어쨌든 당시에 나는 영양가를 덜어내더라도 맛에 충실하고자 했다. 진한 과육 알맹이만을 입으로 쏙쏙 넣었다.


다 크고 나서는 흰 껍질을 떼내는 것이 귀찮아서 그냥 대충 껍질을 깐 뒤에 두세번 만에 우걱우걱 귤을 씹어 먹었다. 귤껍질이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뜨끈뜨끈한 방바닥에 앉아있다가 겨우 몸을 일으켜 세워 노래진 혀를 닦았다.


모든 사람의 겨울이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의 겨울도 계속 이런 모습일 거라고 생각했다.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그동안의 겨울은 윗배만 볼록 나올 때까지 한자리에서 탐욕스럽게 귤을 먹어치우는 시간들로 채워져 있다.


독립하기 전에는 집에 굴러다니는 게 귤이라 박스를 휘저으며 작고 단단한 것들만 솎아냈다. 그렇게 맛있게 익은 것들만 얌체같이 챙겼고, 한 번에 많은 개수를 먹었다. 문득 박스에 오랫동안 남아있던 못생긴 귤들은 어떻게 됐을까 궁금해졌다. 부모님은 내 앞에서 ‘진짜 귤 맛은 이렇다’하시며 덜 익은 귤들을 맛있게 드시곤 했는데, 시큼한 쇼맨십에도 나는 작고 맛있는 귤들을 놓지 않았다.


엄마는 내가 집을 떠나고 나서야 작고 옹골진 귤들을 마음껏 먹었을까.


늘 박스로 쌓여있는 귤들을 곁에 두고 자란 나는 시건방지게 제 값을 치르고 귤을 사 먹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엄마가 나의 안위를 걱정하는 방식으로 과일을 화제로 올렸을 때, 그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귤을 먹고 사냐고 물어봤을 때 비로소 나는 혼자 사는구나 느꼈다.


혼자 산다는 건 귤을 직접 구매해서

먹어야 하는 생활인 것이다.


귤이 얼마였더라. 카카오톡 선물하기에서 친구들에게 생일선물로 커피를 줄 바엔 귤이나 주자 하며 한 박스를 보냈으니까 적어도 커피세트보다는 적은 금액일 것이다. 그러니까 커피세트 보다 저렴한 귤을, 밥은 남겨도 손을 노랗게 물들이며 박스 하나를 거뜬히 먹어치우던 내가, 안 먹고 있으니 연민을 불러일으킬 만 하다. 홀아비같은 딸이 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바로 귤을 주문했다. 1.5 키로에 10,900원. 배달해서 먹는 음식 값도 안 되는 금액. 이걸 나는 왜 먹지 못하고 있었을까. 아니 먹어야겠다는 생각도 안 했을까?


출처 pixabay

귤은 가족의 과일이다. 개수가 많아서 혼자서는 구매하기가 버겁게 느껴지기도 하고. 누군가 맛있는 귤을 먹을 때 누군가는 맛없는 귤을 책임지는 시스템에서 귤이 제 시간 안에 소진될 수 있다. 또 귤은 엄마가 딸의 영양을 챙기게 하는 과일이고, 밥을 안 먹겠다는 딸에게 쉽게 건넬 수 있는 과일이고, 딸이 방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마루에 앉아 오랜 시간 머물며 대화할 수 있게 하는 과일이다.


이제 나는 맛있는 귤도 맛없는 귤도 모두 책임지고 먹어야 한다. 밥을 건너뛰고 잠에 드는 대신 귤이라도 챙겨 먹으며 노트북에 앉아 글을 쓰는 것으로 대화를 대신한다. 그렇게 내가 나를 돌봐야 한다. 혼자 사는 사람이 귤을 먹는다는 건 여러 가지 다짐을 하게 만든다. 냉장고 안팎의 과일들. 선반 위 식물들. 눈길을 잘 주지 않아 모든 생생한 것들이 쉽게 죽어버리는 사막 같은 원룸에 나는 귤을 들이기로 했다.





“선은아 너 옷 시킨 택배들이 여기로 왔더라”

“아 엄마, 내가 예전 주소로 시켰나 봐”

“언제 가지러 올 거야?”

“금방 갈게”


그런데 마음따라 바로 갈 수가 없다. 일들이 쌓인다. 쉬고 싶다. 약속이 생긴다. 미룰 수가 없다.


“엄마 나 오늘은 결혼식 가야 하는데, 이번 주 일요일 아침에 가도 돼?”

“일요일 아침엔 스케줄이 있으니 저녁에 와”

“나 다음 주가 촬영이라 저녁엔 조금 일할 게 있어”

“그럼 그냥 오늘 너 나가 있는 동안 집에 갖다 둘게”


내가 남의 결혼식을 오다니며 밖을 방황하는 동안 엄마는 주인도 없는 집에 조용히 왔다 가셨다.


밤 9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가니

오배송된 옷들과 함께

타조알만 한 한라봉이 포장되어 있었다.


이제 막 혼자 귤을 사기 시작한 딸을 위해

엄마는 한라봉을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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