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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샛별 Feb 17. 2020

팥을 삶으며

-내 안에 존재하는 엄마의  얼굴

브런치 글을 쓰다가 불현듯 단것이 먹고 싶어 졌다. 마트에 가기도 싫어서 팥을 삶기로 했다.

구수한 팥향이 집안에 퍼지고. 잘 삶아진 팥을 작은 그릇에 덜어서 설탕을 넣어서 맛을 본다. 갑자기 작은 아들 녀석이 생각난다. 팥은 녀석이 정말 좋아하는 것이다. 젊은이 답지 않게 삶은 팥을 너무도 좋아하는 아들은 냉동실에 소분되어 있는 팥에 설탕을 넣어 먹는 것을 너무도 좋아한다.


모두 같이 살 때는 음식을 앞에 두고 누군가를 떠올릴 일이 그다지 없었는데.. (물론 엄마가 좋아하시던 음식을 놓고는 돌아가신 엄마 생각을 하기는 했다)


혼자서 내가 먹으려고 만든 음식을 앞에 두고 아들 얼굴을 떠올리다니...  내게 존재하는 낯선 얼굴에 잠시 당황스럽다.




뻐꾸기 소리를 들으면 엄마가 생각난다

 어린 시절 뛰어놀던 산과 들. 뻐꾸기가 울던 날들의 기억. 그저 일터에서 돌아오실 엄마를 향한 기다림만이 기억이 난다. 어린 시절 엄마의 모습은 늘 바빴다. 많은 일들 속에서 당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셨다. 늘 어미새처럼 우리를 먹이시고 입을 것을 챙겨 주시느라 내가 본 엄마의 모습은 늘 뒷모습이다. 아마도 항상 끼니를 걱정하셨을 듯하다. 우리 가족 모두에, 친척들도 이웃도 챙기시느라.

 당시에 엄마는 내게 세상 전부였다. 그 자체다. 젊은 시절의 엄마 모습이다.


대학 시절, 시골에서 처음 집을 떠나야 했던 나는 캠퍼스를 걷다 뻐꾸기 소리를 들으면 집에 계신 엄마를 많이도 그리워했다. 엄마는 대부분의 가족들이 결혼을 하여 떠났고, 막내인 나마저 대학 생활을 하러 떠난 뒤라 아버지와 둘만의 단출한 살림살이를 챙기시며 텃밭에서 풀을 매다가 그 소리를 들으셨을지도 모른다. 그때의 엄마는 나에게 있어 편안함, 무조건적 수용, 무한한 사랑, 위로로 기억이 된다. 집으로 돌아가면 느껴지던 그 안락함. 단지 그렇게만 엄마를 기억했다. 늘 내가 돌아갈 곳으로. 나를 그리워할 엄마의 모습을 그려본 적이 없다.

그 시절의 엄마는  지금의 나보다도 더 젊은 엄마다.  중년의 엄마다.


봄이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의 산책길에도 뻐꾸기가 운다.

늘 그 소리를 들으면 엄마를 그리워했지만 올해의 나는 또 다른 엄마의 모습을 생각하며  그리워할 것 같다.. 무심코 당신의 식탁 앞에서 자식이 좋아하던 음식을 바라보며 외롭게 그리워하셨을 노년의 엄마 모습을.


빈 식탁에 혼자 앉아서, 불현듯 내 안에 있는 노년의 엄마 모습을 보았다.




혼자 있는 엄마가 답답할까 봐 두 아들이 브런치에 글쓰기를 추천했다.  컴퓨터를 업그레이드해주고, 글쓰기 모임을 추천해 주었다. 그렇게 시작한 글쓰기는 대부분의 글감이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라(지금의 내가 접할 수 있는 것들이 그러하므로) 부끄러울 때도 있고, 시대에 뒤떨어진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가 어려워지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아들들은 괜찮다며 용기와 위로를 해 주곤 한다. 브런치는 내게 즐거운 놀잇감?(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진지한)이다. 혼자서 하던 글쓰기를 타인과 나누는 경험은 또 다른 느낌이다. 오래전부터 글쓰기는 나의 치유 방편 중의 하나였고(아이패드에 온갖 이야기를 다 썼다. 불만과 섭섭함과 억울함과 슬픔 등등.. 이상하게도 기쁠 때의 이야기는 적다), 올해의 언젠가 리스트 중에 제대로 글을 쓰겠다는 소망이 자리 잡고 있긴 했다.


이제 브런치를 통하여 새로운 여행을 하고 있다. 여러 사람들의 삶에 대한 글을 읽고, 같이 느끼고 공감하고, 같이 슬퍼하고, 같이 웃고, 시를 읽고, 아주 새로운 신기한 세상 이야기들도 접한다. 아주 멋진 이들의 삶 속으로 함께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최고의 시간이다. 글쓰기를 배우느라 새로운 공부도 하게 된다.


어느새 자식들은 자라서 내게 기댈 언덕이 되어주고 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넘치게 듣다 보면 내 마음에 하나씩 밝은 등불이 켜진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고맙고, 감사하다.




엄마를 그리워 하지만 노년의 엄마에게서 내가 싫어했던 것이 있었다. 아마도 엄마가 싫은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여성에게 씌워진 굴레를 묵묵히 받아들였던 당신의 그런 삶이 싫었던 것이다. 최선의 삶을 살아오셨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당신 자신이 없던 삶, 나이 들어서 힘이 없어 의지할 수밖에 없는 순간까지도 끊임없이 자식을 염려하셨던 삶이 안타까웠던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지막 방법은 잡고 있는 손목을 놓는 것이라 한다. 부모가 자기 인생을 살지 못하면, 그러니까 자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자기 욕구를 채우지 못하고 자기 삶의 몫을 누리지 못하면 그것은 자기 영혼을 저당 잡히는 것과 같다. 부모가 자기 영혼을 저당 잡히면 그 이자는 고스란히 자녀들이 갚아야 할 빚이 되고 만다                          -다니엘 고틀립('반만 버려도 행복하다' 책 중에서)


같은 엄마라지만 우리 시대의 엄마는 훨씬 나은 삶을 살아가고 있고, 점점 더 나은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오롯이 자신으로서도 꿋꿋하게 사는 엄마의 모습을 자식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그리고 의지해야 할 순간이 온다면 부끄러워하지 않을 만큼 지금의 나로 살고 싶다. 글쓰기는 그런 나를 늘 돌아보게 한다.


그러나 한편 잘 모르겠다. 나이 들어가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은 꼭 그때쯤 되어 봐야만 알 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노년의 엄마의 얼굴을 지금사 다시 보게 된 것처럼 말이다. 그때가 되어봐야 아는 것이 있다는 것!





노년의 시간을 향해 발을 딛으며 기대기만 하는 삶이 아닌 독립적인 나의 삶을 꿈꾸어 본다.

하지만 무릇 다른 엄마들이 그러하듯 자식들이 힘들어 나의 그늘에서 잠시 쉬고 싶은 날이 있다면 소박한 찬에 사랑을 담아 그들을 위한 식탁을 차릴 것이다.

 

엄마와 비슷한 얼굴을 지니고 있지만 더 업그레이드된 엄마로 지금의 나는 말하고 싶다.


너희들은 너희들의 길을 홀가분하게 가거라.
너희들이 가르쳐 준 다양한 놀잇감으로
난 즐겁게 나의 삶을 꾸며 갈 테니.
어느 책의 글귀처럼 피카소가 가진 능력 중 피카소처럼 그리진 못해도
 혈기왕성한 새끼 고양이처럼 지칠 줄 모르고 즐겁게 놀 테니..
노년의 행복이란 대단한 것이 아니다.
꽃밭에 꽃씨를 뿌리는 일.
손자에게 편지를 쓰는 일.
반짇고리를 정리하는 일.
그런 소박한 일이다.
작은 일들에 숨어있는 즐거움의 조각을 찾아내는 일이다.

                   -반만 버려도 행복하다(김정옥)


아들이 챙겨 준 기기를 이용하여 내 젊은 시절 듣던 팝송을 들으며 흥얼거리는 시간이 즐겁다. 때로는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지만 글을 쓰는 시간 또한 즐겁다. 오늘도 글을 쓰다 말고 때아닌 간식거리를 만들다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엄마와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낸 것은 힘든 시간이었을지 모르지만, 돌아가시기까지 가까이에서 보낸 시간들은 참 소중하다. 평범한 바위에 아름다운 수정이 자라나듯이 그 시간의 기억들 속에서 새로운 깨달음들이 자라난다.


우린 늙어 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것이라는 유행가 가사가 와닿는 날이다. 


Photo by Liv Bruce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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