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의 시대, 삐삐의 시대를 거쳐 문자로 카카오톡으로 페이스북으로 인스타그램으로. 변천하는 소통의 시대를 거쳐 온 지금의 젊은 이들에겐 ' 옛날이야기' 일 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 우리들의 어머니들은 모든 것을 다 당신 스스로 만들고 입히고 먹이시느라 늘 바쁘고 고단하셨다. 그 바쁘고 힘든 와중에도 늘 따뜻하게 돌보아 주시던 어머니. 어린 나는 엄마의 고단함을 모르고 그저 행복하기만 했었는데... 나이가 들어가며 삶의 고단함을 느낄 때마다 내 나이의 엄마를 돌아보게 되고 그리워하게 된다. 희미한 기억 속 엄마의 일 가운데 함께 했던 엄마와의 시간들은 지금은 나를 쉬게 하는 따뜻한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대개의 여자아이들과 달리 중. 고교 시절의 나는 가장 가정 시간을 싫어하는 아이중 하나였다. 수업 이외에 꼭 몇 가지 소품들을 만드는 시간이 있었는데, 수를 놓거나 스커트나 가방 만들기, 뜨개질하기 등을 하고 이것을 성적에 반영하곤 했으므로 내게는 항상 타과목에 비해 가정 성적은 나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여학생들이 즐거워하는 무엇인가를 만드는 일에 영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겨우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대충 작품을 마무리하거나 몇 개는 미완성인 채로 남기기도 했다. 그런데 아이들이 자라 둥지를 떠나가고 나이에 따라 주어지는 여러 가지 복잡한 일들을 우리가 주재해야 하는 시기가 왔을 때 삶의 무게를 이겨내기 위해 내가 선택한 것은 의외로 바느질이었다. 평범한 옷에 수를 놓아 나만의 옷을 만들거나, 수를 놓은 자잘한 작은 물건(가방, 책꽂이, 소품 커튼, 모자, 방석 등)들을 만들게 되었는데, 그저 말없이 수를 놓는 그 시간이면 나의 마음에는 평화가 찾아들곤 했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인가 색실 통이며, 수틀이며 반짇고리가 나의 필수품이 되었다. 그렇게 바느질을 하는 것이 나를 치유시키는 순간들이 되면서 들여다본 반짇고리 속에서 나는 한 조그만 여자아이와 지금의 나보다 더 젊은 나의 엄마가 바느질을 하며 한숨짓고, 때론 즐거워하시던 모습을 보았다.
어린 시절 우리가 덮던 이불은 모두 빳빳하게 풀을 먹인 하얀 호청을 씌운 솜이불이었다. 호청을 갈 때가 되면 엄마는 깨끗하게 손빨래한 호청을 양쪽을 장대로 지탱하게 만든 빨랫줄에 활짝 펴서 말리고 밥을 주머니에 넣어 풀 주머니를 만들고 물속에서 주물러 만든 풀물 속에 호청을 담그셨다가 다시 펴서 꾸덕하게 말리셨다. 거의 마른 호청은 내가 양귀 퉁이를 꼭 잡고 당신이 움직여가며 네 귀를 딱 맞춰 접고는 다듬이질을 하시거나, 다듬이질을 하지 않고 접은 호청을 보자기에 잘 싸서 방바닥에 놓고 막내인 나를 업은 채로 밟아서 주름을 펴곤 했다. 그럴 때면 엄마의 등에 업혀 엄마의 흥얼거리는 노랫소리를 들으며 기대어 있다가 까무룩 잠이 들기도 했다. 호청이 손질이 되면 엄마는 넓은 방바닥에 호청을 잘 펴고 위에 솜이불을 얹은 다음 양귀 퉁이를 반듯하게 접어가며 호청을 시침질하셨다. 어린 나는 시침 중인 이불 한가운데에 누워있다가 실 귀를 끼워 드리는 것이 나의 의무였다. 굵은 흰 무명실이 모자라면 엄마는 나의 양손을 벌려 실타래를 얹어주고, 실패에 실을 감으시며 옛날이야기를 해주시기도 했다. 솜이불을 아직도 지니고 있는 것은 그런 추억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가끔 솜이불을 시치며 그 뽀송한 어린 시절의 솜이불을 느껴 보곤 하는데, 그럴 때면 우리 집 강아지가 어린 시절 나 대신 이불 한복판에 느긋하게 누워 그 푸근함을 느끼곤 했다.
어느 날 베갯잇을 꿰매다 말고 펼쳐본 반짇고리 안. 무신경하게 두었던 엉킨 흰 무명실 타래를 발견하곤 혼자 실을 감았다. 그 작은 일을 하면서 잠시 그 시절 엄마와의 시간을 추억하며 엄마의 마음이 되어 이제는 하늘에 계신 보고 싶은 엄마를 그리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