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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샛별 Jul 29. 2020

마음을 전하던 시

- 소중한 인연

낙엽이 정겹게 뒹굴던 어느 가을날

당신은 조금 더 성숙해진 모습으로 바바리코트의 깃을 올리며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함께 했던 젊은 날을, 또 앞으로의 우리의 노년을  위한 이야기들을 나누었지요.

따뜻한 가을 낙엽 빛깔의 만남이었습니다.

만남의 시간은  어찌도 그리 빨리 흘러가 버리던지요.

기쁨은 잠시, 또 헤어질 시간이었지요.

그렇게 기약 없이 우리의 만남은 이루어지곤 했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것은 첫 발령지에서였지요. 모든 것이 어설프고 수줍던 저에게 따뜻한 마음으로 다가와준 당신.

어느 아침 출근길에 시골 둑길에 피어있던 보랏빛 나팔꽃 한송이를 당신의 책상 위에 슬그머니 올려놓았더랬지요.

다른 이라면 웃어넘기고 말았을, 그 수줍은 아이 같던 마음을 전했을 때 당신이 보내준 시 한 편. <아스라> 하이네의 시였더랬습니다. 그 이후로도 당신은 제게 곱게 종이에 적은 시를 슬며시 전해주곤 했지요. 저는 들꽃을 선물하고요. 너무도 따뜻한 당신의 마음이 첫 직장에서의 어려움을 이겨내는데 얼마나 큰 힘이 되었던지요. 그 아름다운 시들처럼 저는 당신에게 빠져들었습니다.


지금의 저라면 그리할 수 없었을 터이지만 함께 작은 저의 시골집을 방문했던 기억도 떠올려 봅니다. 바보 같으리 만치 순진했던 저이기에 싸리 울타리에 콩꽃이 피어있고 봉숭아며 다알리아 채송화 같은 작은 꽃밭이 있는 마당 작은 시골집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함께 농사를 지어보던 일도 생각이 납니다.

학교 옆 작은 밭에 함께 심었던 당근 농사 말이지요. 제대로 비료도 주지 않아 아주 잔 당근을 수확하던 일이 생각납니다. 함께 수확하며 기뻐하던 일들이 엊그제 같습니다.


군에서 개최한 경시대회 날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읍내에 갔던 날이었지요. 경연을 마치고 미처 정리도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던 아이를 저는 급하게 달려가 아이를 챙겨 나오는데, 당신은 맡은 아이가 자기 힘으로 모든 것을 정리하고 나오기까지 묵묵히 기다려 주던 모습이 참 인상 깊었습니다. 과잉보호를 싫어했음에도 어느새 닮아 있던 저를 돌아보았었지요. 겨우 한 살 차이였지만 늘 당신은 제게 어른 같았습니다.  "쟤는 밝게 웃는 모습이 너무 좋아"라는 당신의 말에 수업시간에  바라본 아이의 밝은 미소가 공부 잘하는 아이를 무심코 귀여워했던 저를 반성하게 했었지요.

당신은 늘 그랬습니다.


우리가 만나 함께 직장생활을 한 것은 고작 4개월여. 방학이 끝나고 당신은 도시에 있는 학교로 떠나고 당신을 못내 그리워하던 아이들 만큼이나 저도 참 많이 당신을 그리워했었지요. 함께 물수제비 뜨던 그 강물을 바라보며 당신을 많이 생각했었습니다.


당신의 결혼식 날. 의젓해 보이던 당신의 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았던지요. 깊이 고개 숙여 아름다운 모습으로 인사하던 모습을 바라보면서요. 그렇게 당신도 저도 한 가정의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었습니다.  여전히 당신은 제게 좋은 친구로 남았습니다.

첫 만남 이후로 우리가 만난 것은 몇 년에 한 번, 때로는 일 년에 한두 번 정도뿐이 었지만 어느새 당신과 만난 지도 벌써 4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사람들은 자주 만나면 더 정이 든다고 하지만 사람 간의 만남의 깊이가 꼭 시간에 비례하는 것만은 아닌 듯싶습니다. 오랜만에 만나도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우리가 공유한 많은 부분이 그 시간을 뛰어넘곤 함을 느끼곤 했으니 말입니다.


같은 꿈을 꾸고 있음을 함께 나눌 때 느껴지던 행복감을 당신과 참 많이 느꼈습니다.

산티아고의 꿈을 꾸며 서로의 책을 나누어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비록 저는 다녀오지 못했지만 먼저 그곳에 갔던 당신이 보내준 사진과 이야기들. 그때 제가 보낸 어느 수녀님의 메시지를 몹시 힘든 와중에 읽고 큰 힘이 되었었다는 당신의 이야기가 우리의 끈을 한번 더 확인할 수 있어 참 좋았습니다.

책을 읽다가 보내주는 메시지에 찍어 보낸 책 속의 사진이 어느 책에 있던 사진인가를 맞추어 보던 것도 참 재미있는 추억입니다. 함께 하는 무언가가 있기에 가능했던 놀이였지요.

같이 네팔로의 여행을 꿈꾸었지만 지진으로 인해 제주도로 떠났던 여행길의 추억도 제게는 참 소중합니다. 올레길에서 , 또 한라산을 오를 때 물집 잡힌 발 때문에 당신을 참 힘들게 했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어리숙한 저를 감싸며 함께 보내준 긴 시간들이 참 고맙게만 느껴집니다.




40년 전, 스카치테이프의 자국조차 곱게 바랜 시




며칠 전에 제 일기장에 붙여 두었던 당신이 보내준 시가 적힌 종이를 발견했습니다.  종이를 붙여 두느라 썼던 테이프의 자국이 낙엽 빛깔로 곱게 바래어 어느새 40년을  흘러온 우리의 시간을 말해 주네요.

함께 나누어온 시간이 참 소중합니다.

제 삶의 한 갈피를 포근하게 장식하고 있는 그리운 친구.

오래오래 함께 할 수 있기를,

오늘은 제가  그 마음을 담아 시 한 자락을 당신께 전합니다.







벗에게


단비 한 주름이

네 생각을 불러왔을까


가뭄에 눌렸던 숨결을 고르고

눈망울 마다에 깃들이던 어기찬 갈증마저

고이 씻겨들 가는가 본데


십년 세월에 못내

연정도 아닌 어여쁜 정으로 하여

등으로 쬐이는

이른 봄 햇빛같이 따습던 사람

너를 향해 마음의 문을 열었다


솔바람에 자고 깨는

솔숲의 멧새를 닮아

확 트인 목청으로 울고프던 날은

가고 오는 후조인양 서로의 마음밭에

찔레꽃의 둥지를 키워 왔음이여


가시덤불 속

희디흰 꽃잎인양

오늘은 나를 울리누나


좋고 하찮음을

한가지 정으로 쓰다듬기에

물무게에 다스려진 옥대의 밑물인양

봄 가을의 절기가 괴어 왔거늘


장난감에 지친 어린이가

무료히 앞산을 바라보듯

너를 찾을양이면

언제나 부듯한 미소로 맞아주던 얼굴

벗이란 기실

연인보다 너그러워 좋았더니라


깊은 정이야

명주 열두겹속에 감춰둘 보배

내처 말하지 않고 살자꾸나


내 슬픔에 수심져 주고

그 기쁨에 내가 흡족하던 마음

둘이 하나인양 늙어라도 가리

고마운 내 벗이여


   - 김 남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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