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샛별 Mar 02. 2021

제비꽃, 그 아련한 보랏빛 추억

그리운 봄날의 기억




“보랏빛 고운 빛 우리 집 문패 꽃

꽃 중에 예쁜 꽃 앉은뱅이랍니다”

동요 속에 어여쁜 제비꽃의 모습이 있.



오랑캐꽃, 앉은뱅이꽃. 병아리꽃, 장수꽃, 외나물, 씨름꽃 등은 제비꽃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나라에 피는 제비꽃은 50여 종이 넘는다고 하는데 흰 제비꽃, 졸방제비꽃, 콩제비꽃, 남산제비꽃, 알록제비꽃, 고깔제비꽃, 털 제비꽃, 서울제비꽃, 미국 제비꽃, 노랑제비꽃등 등 내가 들어 본 제비꽃의 종류만 해도 참 다. 종류마다 다른 여러 가지 꽃의 색상에도 불구하고 제비꽃을 떠올리면 아련한 보랏빛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제비꽃의 영어 이름 violet은 보라색을 뜻하기도 한다).



숨어 핀 제비꽃 한 송이


옷 벗은 나뭇가지에는 아직 봄이 피지 않았는데, 길가 마른 잔디 속에 꽃이 피었다. 그건 화려한 꽃도 아니요, 지극히 작고 빈약한 꽃이다. 무르녹는 듯한 봄날에 어우러져 피는 벚꽃이나 복숭아꽃도 아니요. 의젓한 자태로 자랑할 수 있는 모란이나 작약같이 남의 눈을 끌  수 있는 것은 더구나 아닌, 조그만 풀꽃이다.
하필 이름이 오랑캐 꽃일까! 자줏빛 작은 꽃은 마른 풀잎 새로 가냘픈 줄기를 뽑아 올려, 아가씨처럼 고개 숙이고 피어있다.

- 이 원수'오랑캐꽃' 중에서


아주 오래전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글이다. 잊히지 않고 제비꽃 필 때마다 기억하게 되는 글.

외국에 살고 있던 친구의 지인은 봄이 되면 더욱 고국이 그리웠나 보다. 봄에 피는 꽃들의 사진을 보내 달라고 했다고 다.

친구는 진달래, 개나리, 그리고 제비꽃의 사진을 찍어 보냈다고 한다. 오랑캐꽃의 글을 배우고 자란 우리들에게 진달래나 개나리 못지않게 제비꽃은 봄날 우리들 곁 아주 가까이에 있는 친숙한 꽃이 었던가 보다.


어떤 이는 제비꽃을 보면 어머니가 생각난다고 다. 이른 새벽 일어나 아침밥을 차리고 밭에 쭈그려 앉아 밭을 매시던 어머니가 떠오른다고 그래서 앉은뱅이 꽃일까. 가냘파 보이지만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힘차게 피어나는 정갈한 모습이 부드러우면서도 한없이 강했던 우리들의  어머니를 떠올리게 한다고 ( 강우근 ‘들꽃 이야기’ 중에서).


또 다른 작가의 제비꽃은 존경하는 스승에게 보내는 사랑의 꽃이다.

스스로 피터팬 신드롬이 있는 복학생이었다던 작가는 스승의 날 학교 뒷산에 올랐다가 작고 연약하지만 아름다운 보랏빛 제비꽃을 한 줌 꺾어 담뱃갑에서 벗긴 셀로판지로 싸고 풀줄기로 묶어 존경하는 교수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단다. 수업 시작 전에 그 꽃다발을 받고 환하게 웃어 주시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는 선생님께서는 여학생도 아니요, 군대까지 다녀온 복학생의 그 엉뚱한 꽃다발이 조금 당황스럽긴 했을 테지만 내가 그 선생님이었다고 해도 참 행복했으리라.

불확실한 미래로 우울했던 봄날에 보았던 눈부신 꽃의 위로, 그리고 작고 소박한  그  꽃다발을 받아 든 선생님의 환한 웃음에서 얻은 또 다른 위로가 작가의 마음속에 평생 남아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대학시절의 시간들은 아주 까마득한 옛 일이 되었지만 작가는 봄이 되어 산과 들에서, 또 도시의 콘크리트 틈새에서 피어 난 보랏빛 꽃을 보면 꼭 어제처럼 그 일이 생각나고, 최소한 1년에 한 번은 그 시절로 돌아가 그날을 기억할 수밖에 없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조병준' 기쁨의 정원' 중에서).


내게도 제비꽃이 피는 때만 돌아오면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있다.

4월 어느 날, 제비꽃이 피어나던 때였을 것이다. 친구들과 아직은 서먹함이 남아있던 신입생 시절 한 친구가 미팅에 같이 가자고 했다. 우리 모두에게 첫 미팅이었다. 모두 여고를 나왔고 남녀 간에 엄격하게 분리된 날들을 보내다가 처음으로 강의실서 만난 같은 과 남학생들과도 영 어색하게 존댓말을 주고받던 때였다. 상대방 남자아이들은  최고의 엘리트들이 다닌다는 학교의 남학생들이었다. 친구의 언니가 그 학교에 다니고 있었던 터라 그 아이들과 연이 닿았우리 학교에 다니던 언니의 친구들이 미팅을 주선했었던 모양이었다.

그날 아날로그식 짝짓기의 방법 중 하나로 꽃 이름과 꽃의 색을 매치시키는 방법으로 상대방을 고르게 되었다. 그런데 미팅 주선을 한 언니들이  자꾸만 친구에게 제비꽃을 고르라고 암묵적인 눈치를 주고 있었다. 하지만 친구가 좋아한 꽃은 장미였고 친구는 그 쪽지를 골랐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날의 킹카는 바로 보라색을 들고 있는 친구였던 것이고 언니들은 친구와 그 남자아이를 엮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제비꽃을 택했던 것은 나였다. 시골에서 올라온, 작은 키에 무잡잡하고 눈만 반짝이던 어쩌면 무던히도 촌스러웠을 여자아이( 후후 아마도 그에게는 폭탄이 아니었을까 싶다)와 짝이 된 킹카라던 아이. 그 아이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던 지는 기억조차 없는 그냥 그런 미팅이었.

그러나 킹카와 나를 엮어 주었던 나의 제비꽃 사랑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서, 매년 봄이 오고 산과 들에 제비꽃이 피어나면 남자아이와의 어설픈 첫 만남이었던 그때를 꼭 한 번씩은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촌스러우나 내가 기억하는 나의 밝고 어여쁘던 시절을,..


때로는 자줏빛의 제비꽃을 만나고, 흰색 제비꽃도 만난다. 때론  향기가 너무도 아름다운 제비꽃(남산제비꽃)을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나에게 있어 제비꽃은 보랏빛으로 기억되어 있어 아련한  보랏빛은 40여 년의 시간을 훌쩍 넘어 늘 나를 청춘의 시간으로 되돌놓아주곤 한다.


그래서 인가. 봄날의 기운이 느껴지는 날들이 오면 노래조차도 옛 기억을 더듬어 노래하는 시인인 듯한 가수 조동진의 ‘제비꽃’을 틈틈이 찾아 듣게 되곤 하는 것이다. 

그렇게, 잔잔한 톤으로 읊조리듯 노래하는 그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그 속에 스며든 나는

어느새 20세 꽃다운 청춘이 되어 있다.


내가 처음 너를 만났을 때
너는 작은 소녀였고
머리엔 제비꽃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멀리 새처럼 나르고 싶어

내가 다시 너를 만났을 때
너는 많이 야위였고
이마엔 땀방울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작은 일에도 눈물이 나와

내가 마지막 너를 보았을 때
너는 아주 평화롭고
창 너머 먼 눈길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한밤중에도 깨어 있고 싶어.

- 조 동진 ‘제비꽃’



향기 그윽한 남산제비꽃


무덤가 풀밭 위에서 만난 하얀 제비꽃


한라산 수목한계선을 넘어 만난 바람속의 노랑제비꽃




날씨가 하루가 다르게 따뜻해지고 있다. 어느새 매화가 꽃봉오리를 열기 시작했다. 어제는 양지 녘에서 수줍게 피어난 봄까치꽃이 파란 얼굴을 내게 보여주었다.


추운 시간들을 딛고 피어나는 봄꽃들을 바라보며 그저 옛시간을 돌아보지 만은 않는다.  매체들 속에서 보여주는 화려한 것들에 환호하고 동경하는 많은 세태 속에서도 자신들만의 삶을 말없이 살아내는 많은 이들을, 우리네 어머니 같은 이들을 그 꽃들 속에서 보게 되는 것이다. 추운 시간들을 말없이 견디며 살아내고 있는 많은 이들을, 우리 주변에 있는 좋은 이웃들을.


장미도 예쁘고 화려한 벚꽃도 아름답지만 아직 추운 겨울을 지나고 만나게 되는, 우리 발길 아래에 피어나고 지는 아주 작고 어여쁜 들꽃들의 마알간 얼굴들을 바라보면 어쩌면 이렇게도 어여쁜.

그 자그마한 꽃송이들이 치 어린 아기의 손과 닮았다. 작지만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희고 완전함 그 자체인 말랑말랑한 아기들의 손. 

제비꽃, 봄맞이꽃, 봄까치꽃(큰개불알풀), 냉이꽃, 꽃다지, 벼룩나물 같은 우리 주변의 작은  들꽃들이 아기 손 흔들듯 수줍게 하늘하늘 나를 부르면 어느새 나는 무릎 구부려 땅에 엎드리고 만다. 

꽃들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자그마하고 앙증맞은 꽃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시간은 소박하지만  행복한 시간들이다.


어느새 찬 바람 속에도  봄이 느껴진다.

3월의 바람 속에 감겨오는 따스한 봄의 내음을 들이마시 여느 봄처럼, 올해도 보랏빛 제비꽃을 기다 중이다. 




아주 조그만 봄까치꽃( 실제크기는 지름이 5~7mm)


* 모든 사진은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마음을 전하던 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