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나무들 중에서가장 먼저 가을을 느끼고 색색이 물들어 가는 것은 벚나무들이다. 어느새 노란 잎, 빨간 잎, 다홍의 잎새들로 가을 옷을 갈아입고 있다.
물들어 떨어지는 낙엽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떠나야 할 때를 알고, 버려야 할 때를 아는 자연의아름다움.
가을날의 낙엽은 꽃처럼 아름답다.
언젠가 서울 대학교 수목원에서 만난 노년의 해설사가 들려준 말이 기억난다.
'단풍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나이가 들어서야 더 깊이 알게 되었노라고.'
지는 잎이 꽃보다 더 고울 수 있음은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삶에서 우리가 버려야 함이나 내려놓아야 하는 일들을 깨닫게 되는 때가 오면 절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닐는지... 그저 모든 단풍이 마냥 아름답게만 느껴지던 젊은 날은지나, 이제 가을날의 물들어 가는 잎들을 바라보는나의눈길은서서히 바뀌어 간다. 다가오는모든 것들을 가벼이내려놓는 일, 힘든 겨울을 묵묵히 이겨내려는 힘, 가을 숲에서 느껴지는한 해를 보내는 묵직함, 그 모든 것들 속에서 비워짐으로써 얻어지는 숲의 넉넉함을 알기에 눈을 들어 바라보는 가을 숲은 참 사랑스럽고 또한 쓸쓸하다.
아파트 곁 작은 숲에서 나뭇잎을 주웠다.
아이들이 내게 물었다. "왜 나뭇잎을 주우세요?"
"그냥. 재미있어서."
그렇게 대답하고 돌아서면서 주워 든 나뭇잎을 바라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혼잣말을 한다.
"이름이 뭐예요, 내 사랑하는 친구?
이제는 바닥에 누운 당신이 보냈을 일 년의 시간이 궁금하네요. 당신은 누구인가요, 이름이 알고 싶어요."
그렇게 색색의 나뭇잎을 잎맥 하나까지, 모양도 색도 꼼꼼히 관찰한다.
그리고는 몇개를 주워 들고 집으로 돌아와도감을 찾아보고 책갈피에 곱게 간직한다.
지난해 가을이 깊어가던 어느 날 남편의 강화도 출장길에 함께따라나섰다.
강연에서 만나 좋아하게 된 함민복 시인의 이야기가 있는 곳. 그의 글 속에서 만난 강화의 풍경들. 문득 소년같이 얼굴 붉히던 그 모습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강화도를 향하여,그의 시집 한 권을 챙겨 들고서.
미팅이 있는 곳에 가기 전 남편은 나를 전등사 남문 입구에 내려주고 떠났다. 다섯 시간 정도의 나 혼자 만의 시간이 주어졌다.
우선 전등사경내를 둘러본다. 소박한단청과 날아오를 듯 들어올려진 대웅보전의 모습. 자연스럽게 가꾸어진 가을 꽃밭을둘러보고 아기자기한 샘가에 서서 물그림자를 바라보기도 했다.
작은 샘가, 물속에 핀 꽃그림자
이곳저곳 절집 풍경을 보며 걷다가 기념품을 파는 곳에 잠시 들렀다. 조그마한 풍경 하나가 눈에 들어왔지만흔들어 소리를 들어보고 제자리에 두었다.쉬고 싶은 생각에 절 한 귀퉁이에 자리한 찻집에서 차 한잔을 앞에 두고 숲을 향해 난 외딴 자리에 혼자 돌아 앉았다. 조용히 흐르는 음악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우수수 숲 속 나무들이 잎을 떨구고 있다. 보이지 않는 바람의 흐름을, 떨어지는 잎들을 보며 느껴보는 순간이었다. 괜스레 쓸쓸해졌다.
죽림 다원 입구의 아기자기한 풍경 하나
일 년의 절반 가량을 우리 집에서 지내다 오빠네로 떠나시며 늘 하시던 엄마의 말씀은 '내년에는 다시 올 수 있을까?'였었는데...아침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 개운하기보다는 삐걱거리는 다리나 어깨의 관절들과 마주할 때. 자주 잊고 생각나지 않는 언어들이 생길 때, 지나간 시간의 기억들이희미해질 때.
그럴 때면 이 가을이 지나고 다시 봄을 맞을 수 있을 건지, 몇 번이나 새봄을 만날는지 그런 생각이 가끔 들기도 한다. 다가오는 노년의 시간들의 밑그림을 어렴풋이 알기에 기쁘게 받아들이려 마음을 다독여가며소중한 하루하루를 아끼며 살다가도 그럴 때는 속절없이 쓸쓸해진다.
'위로가 필요해'
나를 위해 보아 둔작은 풍경 하나를 샀다.
그리고 다시 떠나는 길.올려다 보이는 산성을 오를까 몇 번이나 고민하다가 내 무릎 상태를 살펴보고는전등사 동문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숲길을 타박타박걸어 내려와초지진을 향해 걸었다.인도가 없는 시골길을 천천히 걷다가다리가 아파올 때쯤 버스를 타고 초지진으로 향했다. 초지진은 작은 성곽으로 쌓여있고 탁 트인 정경 너머로 멀리 김포가 바라보인다. 친구와 함께 걷던 김포 평화누리길이 지척이다. 초지진을 한 바퀴 돌아보고 나서강 건너 대명항을마주한,바다를 향해난 벤치에 앉아 함민복 시인의 시집을 읽었다.가끔씩 눈을 들어 바다를 보고 등대를 보고 물의 흐름을 바라본다.
어느새 서서히 노을이 내려앉고 있었다. 주위에 조금씩 어둠이 오는 시간이 되어서야 남편과 만나집으로 돌아왔다.
초지진에서
반짝이는 건 작지만 마음속에 있었다.
노년의 일상은 늘고인 물 같았고, 둘러보면 필요하다고 모아놓은 것들 또한 그저 그런 얼굴 들이다.어제와같은 듯한 날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사뭇 빠른 속도로 흘러간다.
그런 나를 가슴 뛰게 하는 것들은 때로 여행길에서 만난풍경하나일 때가 있다.
그날, 숲을 바라보던 시간이 그랬다.바다를 향해 한참을 앉아 있던 시간이 그랬다.
나만의 카페 풍경
아침이면나를위한 커피를 갈고 핸드드립커피를 내린다.
그리고 딸랑딸랑 풍경을 흔들어나를 부른다.
샛별님 커피 나왔습니다!
그렇게 행복한 아침 시간을 연다.
그럴 때면 그날의 절 풍경도 마당도 모두 잊혔지만 위안을 주던 가을바람소리만숲의풍경에 담기어 나에게 온다.
보이지 않는 잔잔한 바람에도 나뭇잎들이 소복소복 내려앉던 숲의 정경이 함께 내게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