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의 숲-봄. 여름. 가을. 겨울(이순우 글 그림)을 읽고
드물게 어떤 원고를 대할 때 원고를 검토하는 편집자의 입장을 잊어버리는 순간이 있다. 이것저것 따지고 들어간 어느 전시회에서 불현듯 숨을 멈추고 서 있었던 어느 그림 앞에서 처럼, 편집자로서의 나를 망각시킨 채 독자로 탈바꿈시키는 원고. 그런 경험을 나에게 선사한 원고가 바로 이 책이다.
- '편집자 노트' 중에서
누군가가 비껴선 자리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자리하고 그 이웃엔 또 다른 것들이 터를 잡아 치열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숲과 들녘은 항상 모자람이 없는 풍요의 느낌을 준다. 그리고 우리 인간을 포함한 다른 모든 것들이 깃들 수 있도록 자신을 열어놓고 품에 모두를 너그럽게 감싸 안는다.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그들의 푸르름과 그늘, 그들이 주는 자양분으로 또 다른 삶을 영위해 나간다.
정작 그들의 모습이 더 숙연해 보이는 것은 나무들이 잎새를 지우고 풀들이 잎을 거두어 빈 숲과 마른 풀대를 만들고 있을 때이다. 그들은 스러졌지만, 속에 또 다른 생명의 신비와 소생의 경이를 잉태하고 있다. 그들은 죽은 것이 아니라 움트는 새 생명의 숨결을 깊은 뿌리와 작은 씨앗에 숨겨놓고 때를 기다리며 인내하고 있다. 대자연의 조화와 섭리에 순응하는 물러남과 기다림의 지혜를 가지고 있다.
- 글머리 '나무숲 풀꽃 들녘'중에서
이 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만나게 되는 나무와 풀들의 친숙한 기운을 마치 내가 그 속을 거니는 것처럼 느끼는 기쁨. 밤꽃 향기가 지면을 빠져나와 콧전에 닫는 것 같은 실감. 도시의 길이나. 동네 뒷산, 혹은 그보다 깊숙한 오솔길을 거닐면서 나무들의 속삭임을 늘 접하고 있지만 그 이름이나 아우라가 알 수 없는 의문으로만 남아있는 경험이 있었던 분들이라면 이 말이 무슨 말인지 공감하리라.
-'편집자 노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