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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샛별 Apr 18. 2021

노교수와 아버님

닮고 싶은 이의 뒷모습




나도 잘 살아갈 수 있을까?



1920년생 102세 철학자의 행복이야기를 들었다.

 ‘백세를 살아보니”라는 김 형석 교수님의 대담 프로그램에서.

대학 새내기 시절 처음 책으로 만난 철학자.

아끼는 후배에게서 선물 받았던 그의 문고판 책이 벌써 46세, 아직도 나는 그 책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노교수님은 행복을 이렇게 이야기하시고 계셨다.

30세까지는 즐겁게 사는 것이, 60세까지는 성공이, 그 이후는 보람 있게 사는 것 이렇게 사는 것이 행복이다.

무엇을 쫒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과정에서 얻는 소소한 기쁨들이 곧 행복이며 돌아보니 그의 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어 황금기라고 생각했던 시기는 65-75세였고, 당신의 좋은 책은 정년 후에 나왔다는 것이다.

이제는 자식들과 함께 좋은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하시면 비록 나이 들어 돈을 내지는 않아도 식당에서 써빙하시는 분에게 고맙다고 진심에서 우러나는 인사를 하시면서 손자들에게 사람을 대하는 제대로 된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당신의 일을 한다시며.

바로 그 나이, 그 황금기에 접어든 나에게 노교수님의 이야기는 큰 위로가 되어주었다.



100세가 넘었어도 잘 살아오신 노교수님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겹쳐지는 얼굴이 있다.

바로 나의 시아버님의 얼굴이다.

그 아버지가 너무 좋아서 선뜻 남편과의 결혼을 결정했었다.

그런 결정의 이면에는 늘 술을 드시던 나의 아버지, 늘 아프던 나이 많은 아버지가 계셨다.

이제 이만큼 나이 들어 돌아보면 아버지가 왜 그리하셨는지  아버지의 외로움을 이제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지만 50세 가까이에 얻은 당신의 막내딸인 나는 젊은 시절 내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한 분 밖에 없는 누이는 아주 멀리 시집을 갔고, 젊은 아내와 결혼해서 그녀의 형제들과 친가족처럼 지냈다는 아버지. 그러나 그 과정에서 사업도 잃고 가족 같던 처가 식구들과도 멀리 되셨으니 많이도 외로우셨던 게다. 그리하여 그 외로움을 늘 술로 달래셨을 것이다. 나는 그 모습을 싫어했던 것이다.


나의 아버지도 좋은 때가 있었다고 했다. 언니들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하모니카를 불며 함께 시간을 보내고, 함께 밤낚시를 가고, 바닷가에 가족을 데리고 가서  솥단지를 걸고 음식을 나누는 시간을 즐기셨었다는데, 특히나 그 좋은 시절에 자라서 란도셀을 메고 세일러복을 입고 좋은 환경에서 살았었다던 큰언니는 그런 좋은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던가 늙은 아버지를 참으로 잘 챙겨드리곤 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버지와의 좋은 기억은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그나마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함께 간 산행에서 귀한 나물을 뜯어 주먹밥과 함께 건네며 두 손으로 샘물을 떠 마시는 것을 가르쳐 주시던 것이었다. “당귀를 씹고 난 후에 물을 마시면 이게 산삼 썩은 물이란다”하셨던 아버지. 화하게 입안을 맴돌던 약초의 맛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약초에 능통하셨던 아버지는 내가 약초에 관심을 갖는 것을 뿌듯해하시며 즐거이 그 이름을 일러 주시던 기억이 난다.

달 밝은 밤이면 들창을 열고 가뿐 숨이지만 멋지게 퉁소와 하모니카를 부시던 아버지의 기억. 그 핏줄인 내가 악기를 연주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그렇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70년대 교통이 잘 발달되어 있지 않아서 자주 집에 들르지 못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함께 대학생이 되어 생활하던 우리들은 동향인 어느 누군가가 집에 가게 되면  반드시 못 간 선후배 집에 들러 서로 뭔가를 받아 전해 주곤 했다.

그때 처음 만난 한 선배의 아버지. 그 선배네 집에서 그의 아버지를 처음 만났다.

진중하시고, 다정하시던 선비 같은 그의 아버지. 선배는 당시 그 아버지를 참 많이도 닮은 듯했고 그래서인가 나는 선배를 좋아하게 되었고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나의 첫사랑이었다.

그때 그 아버님께 느낀 좋은 감정은 남편과의 긴 연애 후 결혼을 결정하는데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내 아버지와는 많이 달라 보이던 그의 아버지.

나는 아버님이 참 좋았다.


우리 결혼식 당일 180센티미터 넘는  큰 키의 아버님은 흰 구두를 신으시고 만면에 즐거운 웃음을 띠셨다.

하얀 구두!

결혼식에 참석했던 여러 사람이 그 이야기를 하며 웃었다. 네 시아버지 백구두 신으셨더라!


결혼 후에도 자손들을 너무도 사랑하시던 아버님은 모든 손주들이 할머니 보다도 할아버지 무릎에 앉고 싶어 할 만큼 다정하신 분이셨고, 약간은 고집스러운 맏며느리인 나를 말없이 아껴 주셨다. 수고했노라고 남몰래 주머니에 찔러 넣어 주시던 아버님의 용돈.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면 그 따뜻한 마음 덕분에  명절의 고단함은 저만치 멀어지곤 했다. 서로 다른 정치성향을 지녔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말씀을 드리면, “그러냐, 내 시대에는 이런 일이 있었단다” 하시며 차분하게  왜 그리 생각하시는지 그 시절의 이야기를 조용조용 이야기해 주셨다. 그래서인가 당신의 생각은 이렇다고 말씀해 주셨고 나는 그 말씀을 챙겨 듣게 되곤 했다.

돌아가시기까지 아버님은 큰 소리 한번 거의 내지 않으시고  늘 상대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시고 공감해 주시는 분이셨다.


긴 투병 끝 3년 반 만에 곧 어머님이 돌아가실 것 같다는 병원 측 연락을 받았을 때였다,

" 어머니 와의 마지막일지도 모른답니다"

아픈 몸이었지만 아버님은 깨끗하게 양복을 차려입으시고 마나님 가시는 길을 배웅하러 함께 병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슬픔에 잠긴 아버님의 손을 꼭 잡고 병원으로 향했다.

아마도 어머니가 아버님 모습을 보실 수 있었다면... 평생 늘 존경하던 그 모습 그대로 눈에 담고 가셨을 것이다.



꾸준히 공부를 하시고 일상의 소희를 글로 쓰시고, 좋은 글을 필사하시던 아버님.

그러나 어머니를 닮아 흙을 좋아하는 남편은 이제 나이 들어가며 점점 어머니를 닮아간다.  끊임없이 일에 묻혀 이젠 겉모습 마저 아버님의 모습은 사라져 가고  점점 더 어머니의 모습이다. 두 분의 자식이니 그 모습이 잠재해 있었을 테지만...... 그럴 때 나는 아버님이 그립다.


파도야 어쩌란 이냐

님은 물같이 끄덕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유 치환 시인의 ‘ 그리움’ 중에서



이제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게 부족한 점을 그렇게 채우고자 한 나의 어리석음 따위는 지금은 한탄할 일고의 가치조차도 없는 일임을 잘 안다.

또한

남편은 남편이지 아버님이 아니라는 것도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아버님이 그립다.


노교수님의 대담 중 김수환 추기경과 김형석 교수님의 모습이 함께 있는 사진을 보며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에 남았다.

“얼굴은 자신이 만드는 거예요.” 노교수님은 웃으시며 젊은 시절 추기경님의 모습은 당신보다 못하지만 나이 들어 멋진 모습을 가지셨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나이 들어 멋진 모습을 갖는다는 것.

떠나신 뒤에도 남아있는 따뜻한 모습의 기억.

사랑을 남겨주고 떠난 생을 잘 살아 낸 사람의 뒷모습.


내 주위에 그런 분들이 존재한다는 것.

어린 시절 책으로 만난 노교수님, 나의 아버님, 나의 은사님들, 그리고 내 좋은 친구들.

늘 그들을 마음에 담고 나에게 남은 길을 생각하며 살아내고 싶다.


이제는 내가 아버님을 닮아가고 싶다.

노교수님처럼 온화한 얼굴을 지니고 싶다.


그리하여 떠나는

뒷모습이 아름다울 수 있도록.

사랑이 담긴 따뜻한 뒷모습을 지닐 수 있도록.




46년 된 문고판 책(김 형석 교수)






Main photo: Photo by Elio Santos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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