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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샛별 May 03. 2021

나를 깨우는 순간

행복하시나요




앞이 보이지 않고 도 정신도 함께 무너지 시간이었습니다. 그날은.

입맛이 없어서 겨우 몇 술을 뜨고 피곤한 몸을 쉬느라 맥없이 소파에 아무 생각 없이 늘어져 있었습니다.


겨보던 '비긴 어게인'이란 티브이 프로그램 슬레인성 촬영 편이 재방송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가수 이 소라 님에게 노래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생각’이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대화를 할 때, 가사를 쓸 때, 노래를 할 때 그녀는 음악이 곧 자기 자신이라서 대충 해 버리면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버릴 것 같답니다. 노래를 할 때 그냥 소리를 내는 게 아니라 자신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괴롭다고요. 왜 그녀를 그냥 가수보다는 아티스트로 표현하는지, 그녀의 노랫말이 가슴에 그렇게 다가오는지 , 그녀의 노래가 왜 오래도록 그렇게 많은 이의 사랑을 받는지를 알 것만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습니다.


그날 저는 번아웃 상태였습니다. 연일 지속된 제게는 힘든 육체노동에 지쳤고, 여유가 주어지지 않는 바쁜 시간들만 계속되었기 때문이었지요.

몸도 마음도 자꾸만 지치는 주기가 점차 빨라지는 것을 깊이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날.

가수인 그녀의 노래와 같은 제 하루에서 중요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저를 저로 살게 하는가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습니다.





지친 어깨를 늘어 뜨리고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였습니다. 너무 고단해서 내내 정신없이 잠을 잤습니다. 그러다 갈아타야 할 곳을 지난 것은 아닌지 놀라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이미 갈아탄 상태였음을 곧 깨달았지만 말입니다.


창밖에는 연초록 나무들이, 노란 들꽃들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습니다. 밖은 화사한 봄날이었습니다.


유튜브로 노래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곡 조동진의 '행복한 사람'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자주 듣던 노래의 가사가 오늘은 가슴 깊은 곳을 파고듭니다.

울고 있나요 당신은 울고 있나요
아 그러나 당신은 행복한 사람
아직도 남은 별 찾을 수 있는
그렇게 아름다운 두 눈이 있으니

외로운가요 당신은 외로운가요
아 그러나 당신은 행복한 사람
아직도 바람결 느낄 수 있는
그렇게 아름다운 그 마음 있으니


나 답지 않게 살아야 하는 시간이 힘들다고.

욕심내지 않아도 ‘내가 고집하는 나 다움'을 이렇게 뒤로 미루어 야만 하는 시간들이 괴롭다고. 자꾸만 반문하며 일하는 것이 슬프다며 돌아오는 시간이 었는데...

노래를 들으며 밖을 바라보다 '아직은 행복하구나' 하는 마음이 더군요.


시골에서 돌아오니 마종기 시인의 산문집 ‘아름다움, 그 숨은 숨결’이라는 새책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펼친 가장 앞장에는 저자의 멋진 필체로 싸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 2121년 봄   마 종기


상업적인 작은 시도였을 지도 모르지만 짧은 그 글이 제게 하는 작은 위로의 말 같습니다. 좋아하는 작가가 제게 건네는... 따뜻기운이 조용히 스며 전해져 옵니다.

고단한 와중에도 책을 펼쳐 들었습니다.



작지만 소중한 것들 돌아보기


언젠가 젊은 나이에 영어 학원을 다닐 때가 생각납니다.

외국인 선생님이 숙제를 내주더군요. 자신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을 한 가지씩 가져와서  소중한 이유를 영어로 설명해보라는 것이었지요. 희미한 기억이지만 저는 시집 한 권을 들고 갔던 것 같습니다. 첫 직장에서 만나 6개월밖에 같이 시간을 보내지 않았지만 이제는 40년 지기가 된 친구의 첫 시집이었을 겁니다. 오늘처럼 저자의 싸인이 적힌. 그 시집에 실린  중에는 우리가 함께 보냈던 그 작은 시골 에서의 소중했던 시간을 그린 시도 있었지요. 그 시집이 책을 좋아하는 제가 처음 받아 본 저자 싸인본이었습니다.


그 후 몇 권의 그런 싸인본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육아일기를 쓰고 그리고 직접 묶어 결혼한 자식들에게 건네시고 늦은 나이에 화가가 되신 할머니의 책, 귀촌을 꿈꾸던 시절 귀농본부에서 강연 후 만난 저자의 책, 함께 악기를 배우며 만난 어느 은퇴한 공무원 시인의 책도 있습니다.


기억에 남는 작가의 책이 있네요.

여행작가 김남희 씨의 강연을 들으러 간 적이 있습니다. 검은 바지에 흰 남방 차림의 작가의 강연은 무채색의 옷이 더욱 빛나 보일만큼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강연이 끝나고 인파에 떠밀려 나오다 먼발치서 본 작가 근처에 다가가 싸인을 부탁했습니다. 순간 어찌 그런 용기가 샘솟던지.. 아마도 여행을 열심히 꿈꾸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둘러싼 주위의 관계자들을 제치고 그녀가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제가 내민 그녀의 책에 크게 '카르페 디엠'  이렇게 글을 남겼습니다. 책장 빼곡히 놓인 그녀의 책들 중에서도 그 책은 제게 더 소중한 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그 글이, 그녀의 책이, 때때로 진부한 일상 한가운데 먼 곳을 바라보는 힘을 얻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좋아하는 책을 모아둔 코너를 둘러봅니다.

을 뽑아 책의 앞장에 적어둔 스스로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들, 그 책을 얻은 날의 기쁨을 쓴 글들을 읽어 봅니다.

' 애독자 자신의 싸인본' 이라고나 해야 할까요.

오늘까지의 저를 키워 온 것들입니다.


어느 작가님께서 하우스의 꽃은 잘 자라고 있는지 물으시더라고요. 제가 있는 곳은 추운 지방이라 봄이 늦게 옵니다. 제가 사는 도시의 벚꽃이 다 질 때 제야 벚꽃 망울이 막 달리기 시작했었요. 얼마 전에는 막 피어나던 목련이 하룻밤 추위에 다 얼어버렸습니다. 제대로 피어 보지도 못하고 나무 전체의 꽃들이 누렇게 변색되어 떨어지는 목련을 보면서 아침 일터로 향하는 길, 하우스 앞 제 여린 새싹들을 걱정했습니다. 겨우 손톱만큼 밖에 자라지 못한 한련, 벌써 2주 이상 지났어도 이제 겨우 본잎이 뾰족하니 보이기 시작한 채송화. 그러나 오래 추위에 단련되며 자라나는 새싹의 힘은 그 큰 목련보다 강하더군요. 얼지 않고 아주 천천히 천천히 힘을 키우며 자라고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어느 작가님의 블로그에는 하얀 샤스타데이지가 벌써 피어나 멋진 사진이 올라와 있었지만 제 데이지들은 아직 작기만 합니다. 모두 저처럼 늦되게 적응해 나가려나 봅니다. 래도 그 꽃이 피어나는 날을 기다립니다. 저 만의 꽃들을요.

천천히 느리게 강하게 자라서 제게 전해줄 작지만 단단한 행복이 벌써 기다려집니다.


집에서의 며칠 몸과 마음에 물을 주는 시간.

매일 시간씩 마음을 담아 기타를 쳤습니다.

긴 시간 책을 읽고 음악을 들었습니다. 

넉넉하게, 마음의 뿌리 끝까지 그 물이 스며들도록.

 시간들이 정말 얼마나 소중한지요.

지금 여기! 

가치를 다시 깨닫습니다. 

온몸에서 새 가지가 돋아나는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야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지나면 힘든 날들이 줄어들 거라는 것이 보입니다. 한없이 좁아졌던 시야가 다시 조금씩 열리기 시작합니다.





짧은 순간에 느꼈던 그 무엇, 혼란스럽던 때 혼자 중얼대던 불평을 멈추고 한 발짝 물러나 그저 스스로에게 '너 힘들구나 많이'... 하고 받아들여 주던 순간에야 알아차릴 수 있던 너무도 작은 행복의 여린 싹, 그 알아차림은 어떻게 제게 왔을까요.


주변에 흔들리지 않고 잔잔한 고요 속에서 살고 싶다는 것 어쩌면 저를 흔드는 현실 속에서도 괴로워하지 않음을 배우는 일은 아닐까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무엇을 버려야 할까.

오래전에 읽었던 법상스님의 (히말라야,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찾아들었습니다. 표시가 되어있는 부분들을 찾아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책장을 넘기다 보니 그 속에 제가 연필로 써 놓은 이런 메모가 적혀 있습니다.

기쁠 때 바라볼 수 있는 것과 힘들고 어려울 때 볼 수 있는 것은 다르다. 마치 같은 산을 걸어도 오르막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내리막에서 볼 수 있는 것이 다르듯이.  
우리의 삶의 순간은 오르막이든 내리막이든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다.
그 순간순간이 곧 우리의 생이니 말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내게 주어진 인생의 무게가 무거울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짐을 진 채로 그 짐과 하나 되어 몸을 최대한 낮추고 내 아집일랑 버리고 묵묵히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것이다.


그때도 뭔가 힘든 한 고개를 잘 넘는 중이었나 봅니다.



Main photo : 순천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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