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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샛별 Aug 28. 2021

평온한 밥 짓기

다시 나를 돌아본 시간









아들이 다시 낯선 땅으로 떠났다.


한 달여의 시간 아들들과 함께 온전히 엄마로만 살았다.

코로나가 우리에게 준 닫힌 공간과 시간을 타국에서 돌아온 아들과 집에서만 지낸 날들이었다. 오랜만에 주어진 가족들로 복닥대는 삶.

소박일상들 속에 진정한 행복이 같이 함을 알게 된 나이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젊은 시절, 함께 주어지던 많은 일들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일까? 일에 서툰 나도 어느덧 일을 다루는 수용치가 늘어나 있기 때문이었을까?

글을 쓰는 일도, 책을 보는 일도, 음악을 듣는 일도, 악기를 연주하는 일도 거의 뒤로 미루어 놓고 넉넉한 시간을 하루에 들여 평온한 마음으로 밥하고 치우는 일상을 살았다.


먹는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던 아이는 어느새 엄마가 되었고 서툴기는 하지만 최선을 다해 삼십여 년 그날들을 살아냈다. 해야 할 일은 너무도 많았고 늘 쫓기듯 살았지만 항상 정성스럽게 아이들의 이유식을 만들고 밥을 지어 먹이고 도시락을 쌌다. 늘 국이 필요한 남편을 위해 국을 끓이고 어머님의 음식을 배워나갔다.

그 시간의 밥하기는 ‘애쓰는 밥하기’였다.  아이들은 행복한 식탁으로 기억할 그 순간들이  나에게는 늘 일과 시간에 매여 해내야 하는 쫓기는 밥하기였을 것이다.


삼복의 더위 속 한 달이었다. 집에서만 먹어야 하는 삼시 세 끼. 아들이 먹고 싶어 하던 음식들은 애쓰는 밥하기의 메뉴들 속에 있었다. 오이소박이, 된장볶음 두부, 탕국, 배추전, 닭갈비, 감자전, 가지전, 고구마 부침개, 감자볶음, 두부조림, 겉절이 김치, 부각, 전병, 묵사발, 계란찜, 된장찌개, 묵은지 볶음, 깻잎찜, 코다리 조림 등 메모를 해가며 그날의 식탁을 차렸다. 매일 맛있는 핸드드립 커피를 내리고 수박을 자르고 빙수를 사 날랐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지나 생기를 찾은 아들이 감사해하며 해주는 낯선 요리 몇 가지가 내게 선물이 되어 돌아왔다.


나는 밥이 낯선 땅에서 맘껏 울지 못하며 삭혀 내었어야 할 고단한 시간들을 위로해 주는 밥이었으면 했다. 지친 몸을 달래 줄 시간이기를 바랐다. 깊은 곳에서부터 부서지고 허기진 마음이 밑바닥부터 사랑으로 차곡차곡 채워지기를 바랐다.

평화로운 마음으로 하는 밥, 사랑을 담은 밥, 오롯이 밥을 위한 밥, 그렇게 따뜻한 염원을 밥 짓는 시간에 담으며  힘든 시간이 치유되기를 바랐다.

평온한 밥 짓기’의 시간이었다. 모두가 너무도 평화로운 날들이었다.


그 밥을 너무도 달게 먹고, 날개를 접고 쉬는 새처럼 아들은 며칠을 자고 또 잤다.

 그렇게 한 달은 꿈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여고 시절 홀로 바다에 간 적이 있었다. 언니의 출장길에 따라 나서 언니가 일을 하는 동안 혼자 가 본 겨울바다.

한 여름의 흥청거림이 사라진 적막한 바다. 유난히 더 푸르고 그래서 더 희게 부서지는 듯 보이던 파도. 눈이 드문드문 쌓인 모래밭에 앉아서 한참을 바라보던 바다.

모두가 떠난 바닷가에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다시 돌아올 날을 기약하며 푸르름을 눈에 가득 담고 돌아섰던 그날.

하늘, 구름, 파도, 바람, 쓸쓸함, 그리고 혼자만의 시간.


아들이 떠나고 난 고요만이 남은 집안에서 나는 그 바다를 보았다. 행복하게 보낸 여름날 같던 시간 뒤에 다가온 혼자만의 시간이 주는 쓸쓸함과 함께 언제가 될지 기약되지 않은 다음의 만남을 기다리며 마주한 적막을.


충만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밥을 짓던 시간의 기억은 앞으로 적막한 하루를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되어준다.

이제 나만의 고요를 즐길 시간이다. 일상으로 돌아와 필사를 하고, 음악을 듣고, 책을 고 기타를 잡는다.


나이 들어가는 자식들에게는 지켜보아 주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저 우리를 바라보기만 해야 했던 날들의 부모님을 이제야 알 듯 한 시간. 

지금까지는  몰랐던 , 시간만이 가르쳐 줄 수 있는 앎을 배워가는 시간.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내려놓음을 배워가며 깨달아 가는 시간.

그래서 지금이 진정 인생의 황금기인가  돌아보게 되는 시간.

나는 평화로운 밥 짓기의 날들을 통하여 함께한 가족들의 따뜻한 시간을 마음에 곱게 담아 간직했다. 아마 아들들도 그러하리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 간에 보냈던 위로의 눈빛을 우리는 서로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다.




아들을 보내고 미루어 두었던 병원을 다녀오던 길이었다.

시내버스 차창에 기대어 멍하니 바깥 풍경을 바라보다 오랜만에 나무들을 보며 생각에 잠겨본다.


삶이 나무의 한 해와 닮았구나.

그런 시간을 몇십 년이나 반복하며 살아온 오래된 나무들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지닌 이유를.. 알겠구나.


젊은 날의 나는 여름의 나무와 닮았다.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시간. 키도 키워야 하고, 폭도 넓혀야 하고, 꽃도 키워 내야 하고, 열매도 키워야 내야 하고...


이제 노년의 나는 가을의 나무를 닮아가고 싶다.

열매를 성숙시키고, 나이테를 촘촘히 아끼며 키워 나가야 하는 시간.

다음 생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

담담한 마음으로 가을볕에 무르익어 물들어 가는 것들을 음미할 시간.

버려야 할 시간이 다가오면 떨켜를 만들어 미련 없이 잎을 떨구어야 할 시간.

그리하여 겨울바람이 불어와 빈 가지를 흔들 때  충만했던 지난 시간의 기억으로 묵묵히 그 겨울을 지켜 나갈 수 있기를...


나를 돌아본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많은 가지가 자라고 잎이 무성해져서 쉴 품이 더 넓어졌던 것일까. 나의 일에 대한 능력치는 큰 상승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작은 그늘에 잠시 돌아와 쉬었던 아들은 조금이나마 힘을 채우고 떠났을까. '그랬을 거야'라고 믿어 본다. 내가 나의 엄마에게서 그랬듯이.


이제 힘겨워도 그들은 자신들의 나무를 다시 잘 가꾸어 나갈 것이다. 삶의 여름을 치열하게 살아낼 것이다.

먼 곳에서 바라보며 응원하는 내가 서 있는 자리를 , 그들이 고단한 날들을 살다 문득 돌아서 바라볼 때 내가 서있는 숲이 늘 넉넉하고 맑은 겨울 숲 같은 노년이 되기를...


이제는 나를 위한 평화로운 밥 짓기를 꿈꾸어야 할 시간이다.






Main photo : Photo by Gaelle Marcel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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