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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샛별 Dec 28. 2021

한 해를 보내며:나에게 쓰는 편지

 은발 노래를 들으며




집안의 막내인 나는 어쩐 일인지 언니 오빠들보다 먼저 일찍 특정 부위를 시작으로 흰머리가 나기 시작했다. 자주 염색하는 것이 싫어서 이제 그만 그냥 흰머리를 하고 다닐까 봐 하고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면 친구들은 아연질색을 했다. 자식들을 결혼시키고 나서 생각해 보라고. 아들들 결혼에 지장이 생긴다나 뭐라나.

한편 그런 생각도 들었다. 남편 입장에서 보면 늙은 여자와 사는 기분이 드는 것은 아닐까?

염색해야 할 때가 되면 가르마를 타고 하얀 고랑이 생겨 날 때마다 같은 고민을 반복하곤 했다. 하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머리 염색을 못하게 된 것은 지난 오월 심하게 깨어졌던 머리의 상처 때문이었다.

터지듯이 깨어졌던 상처는 꿰매었어도 한참이나 피가 엉겨 붙어 있어 다 낫기까지 꽤 시간을 요했다. 소독을 꾸준히 하고 저절로 딱지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던 터였는데 다 나은 듯하고 딱지가 떨어질 즈음, 다시 진물이 나고 욱신욱신 쑤시는 날이 며칠 계속되었다. 병원에 갔더니 잘 보이지 않아 시골 병원에서 미처 제거가 하지 않은 실밥이 남아있어서 그 부위가 덧난 탓이라고 한다.

두 번째 병원을 다녀오고 난 후 한참의 시간이 지났어도 가끔씩 쑤시는 듯한 상처 부위가 걱정을 불러왔다. 의사는 괜찮다는데 내가 느끼는 불편한 감은 꽤 오래 지속되었다. 그 부위에 독한 염색약이 닿는 것이 싫어 염색을 그만두었다.


마지막으로 염색을 한 지 7개월 가까이 시간이 지났다.

염색약이 빠진 머리카락은 이제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불행 중 다행인지 전부 하얗게 된 것이 아니라 일정 부위는 아주 하얀 머리카락인 부분이 있는 반면 다른 곳은 검은 머리카락이 있어 마치 일부러 부분 염색을 한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그 모습을 보고 원래 말이 없는 남편은 다행히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아들은 진심으로 자연스러운 그 모습이 보기 괜찮다고 한다.


그럼 되었다.

단발 커트 머리에 생활한복을 입고 있는 내 모습을 본 어느 아주머니가 “보살님 어느 절에 다니시나요? “ 하고 묻기도 했었는데, 이젠 나이 드신 어르신이 더 살갑게 말 붙일 수 있도록 흰머리가 한 수를 보태줄 것이다.




작년 이맘때 한 해를 보내면서 쓴 글이 있었다. 글의 말미에 내년에는 한 해를 잘 보내고 내게도 위로의 편지를 쓰고 싶었는데 그새 일 년이 지났더라는...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달 부득이하게 얻은 흰머리를 돌아보고 있노라니 자연스럽고  멋지게 나이 들어가고 싶은 소망이 흰머리를 통해 가까이 다가와, 나의 이름을 가만히 불러 보게 했다.



( 한 해를 보내며: 샛별에게)


별아!

한 해가 또 가는구나.


며칠 전 넷플릭스로 ‘빨강머리 앤’을 보고 있었지. '빨강머리 앤'은 네가 생애 처음으로 받은 시리즈로 된 동화책이었을 거야. 5권의 책을 얼마나 몰두해서 읽었던지 아직도 앤의 딸 리라, 무지개 골짜기, 피리 부는 할아버지와 죽음의 사자, 윌터 , 애덤 이란 닭의 이야기 까지… 그 시절 별로 그림이 없던 책이라 오롯이 나의 상상만으로 그려보던 책 속의 장면들, 그리고 책을 읽으며 느꼈던 감정들.. 희미하긴 하지만 많은 것들이 떠오르더라.

참 재미있게 어린 시절 앤의 이야기를 보고 있었지.

빨강머리가 큰 콤플렉스였던 앤은 어느 날 방물장수에게서 염색약을 사서 검은 머리로 염색을 해보았지. 하지만 그렇게도 바라던 것이었지만 막상 만나 본 모습은 자신이 원하던 그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지. 놀라서 염색약을 지워 보지만 초록색 머리가 된 앤. 결국 머리를 짧게 깎게  되었지. 그녀가 하는 대사에 그런 이야기가 나오더라. 염색을 하고서야 다른 단면을 볼 수 있었다고. 빨강머리가 곧 자신 본래의 모습인데 염색은 그걸 속이는 일이었다고. 앤은 진심으로 빨강머리를 받아들이게 된 거지


그 장면을 보고 있다가 네 모습이 생각났어. 어느새 흰머리가 된 네 모습을.

앤과는 반대로 흰머리를 염색으로 감추고 있다가 본래의 모습을 어쩔 수 없이 드러낸 너.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금은 낯설었지. 애잔하기도 하고.


같은 느낌을 느낀 때가 또 있었구나.

얼마 전에는 라디오에서 ‘은발’이란 노래가 나오더라. 좋아하던 노래였지.

그런데 이제는 곡조보다도 그 가사가 마음에 와닿더라. 

눈을 돌려 주변을 돌아보니 흰머리가 늘어 가는 남편 형제자매 친구들과 지인들의 모습들이 자꾸자꾸 떠 오르는 거야. 나이 먹는 만큼 더 감성적이 되어가는 걸까.


은발 (Silver threads among the gold)

젊은 날의 추억들 한갓 헛된 꿈이랴
윤기 흐르던 머리 이제 자취 없어라
오 내 사랑하는 님, 내 님! 그대 사랑 변찮아
지난날을 더듬어 은발 내게 남으리

은발 다 된 그날에 그대 앞에 말없이
고운 장미 꺾어서 깊은 축복드리리
오 내 사랑하는 님, 내 님! 그대 사랑 변찮아
보금자리 꾸민 날 깊은 안식 있으리

젊은 날의 추억들은 한갓 헛된 꿈이랴
윤기 흐르던 머리 이제 자취 없어라


우리에게 주어졌던 시간이 무르익어, 단풍이 물들듯 흰 머리카락이 늘어가는 시간.

가끔 거울 앞에 서서 조금은 낯선 네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한다. 우연히  염색을 못하게 되어서야 앤의 빨강머리 같은 내 흰머리를 받아들일 용기를 내어본 네가, 이제는 밖으로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내면으로 더 눈을 돌리게 되었으면 싶어. 하루하루 맞이하는 노년의 시간들을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다부짐으로, 부끄럽지 않게 잘 사는 삶을 작은 일부터 찬찬히 꾸려나갔으면 해. 희어진 머리를 지닌 네 모습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면 해.


올해는 두 번이나 예기치 않은 사고로 다치는 바람에 몸의 소중함을 더 깊이 느낀 한 해였지. 덕분에 요즘은 늘 몸의 이야기를 들으려 했고. 몸을 잘 보살피는 네가 대견하게 느껴져.

익숙지 않은 시골에서의 시간들도, 힘들어하고 많이 헤매기는 했지만 어찌어찌 그 고개를 잘 넘었네. 내년에는 어떨지...

아마도 꽃밭을 가꾸는 마음으로 고단한 날들을 잘 가꾸어 나갈 수 있을 거야.


때로는 아프고 바쁜 날들 가운데서도, 네가 일 년을 꼬박 거의 매일 짧은 글이나마 필사를 해 온 것을 대견하게 생각해. 하루 한 줄, 한 페이지가 모여 차곡차곡 쌓여가는 노트를 보며 너를 많이 응원해. 잘하고 있다고.

필사 모임에서 '작은 습관의 기적'이라는 책을 소개받았는데 읽다 보니 너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작은 습관의 기적을 위한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있음을 알았지. 그래서 내년을 위한 아주 작은 몇 가지 습관을 더 이루어 보고 싶어서 포스트잇에 그것들을 적어 보았지. 그렇게 작은 것부터 계획하고 행하다 보면 2022년도 잘 맞이하고 잘 살게 될 거야.


최근 몇 년 너의 새해 슬로건은 '위로'였었지.

네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가며 위로하고 지나온 날들이 일 년이 되고 이년이 되고 이제 벌써 삼 년이 되었구나.

지나고 보니, 긴 세월 너보다는 가족만을 위해 살던 네가 너를 돌아보고 위로하며 보낸 시간들이 너무도 귀하다는 생각이 들어.

나를 소중히 여기는 일은 더 넓은 마음으로 주위를 돌아보게 하는 힘을 얻게 하는 것 같으니 말이야. 좀 더 너른 마음으로 가족들을 친구들을 이웃들을 돌아보게  수 있을 거야.


다가오는 새해에는

주변의 인지하지 못했던 소소한 행복들을 더 돌아보고 싶어.

행운의 네 잎 클로버가 아니라 행복을 이야기하는 세 잎 클로버를 책갈피마다 끼워두는 그런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가꾸어 나갔으면 해.


별아!

문득문득 떠오르는 지난 삼 년의 시간에 대한 그리움들을 이제는 묻어 둘 시간이야.

나이 든다는 것은 편안하고 좋은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자주 해. 내게 주어지던  해야 할 많은 의무나 일들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일지도 몰라. 높은 산 위 전망 좋은 곳에서 굽이굽이 안개에 싸인 산군들을 바라보는 느낌이랄까.

그러나 고인물이 되지는 않아야겠지.

늘 깨어있고 싶어.


언젠가 육신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이 그리운 시간들을 돌아보는 기쁨으로 무료한 시간을 보내겠지만, 지금은 아직도 하고 싶은 일들을 작은 것이라도 꾸준하게 꿈꾸고 이루어 나가길 바라. 마음을 다 해서.

'나이란 상대적인 것이라고, 그 어느 때 보다도 더 강렬하게 감동하고, 삶은 나날이 더 근사 해지는 거'라고 이야기 한 파블로 카잘스의 말을 가슴에 꼭 담아두었으면 싶어.


좋아하는 시인의 시 하나를 네게 선물할게.

안녕! 나의 별.

한 해 수고 많았어.



가을 산
           마 종기 시인

내가 옛날에 바람의 몸으로 세상을
종횡으로 누빌 때
높고 낮은 것도 가리지 않고
치고 안고 뒹글고 다닐 때
산은 자꾸 내게서 눈을 돌렸지.

이제 들리지 않던 소리 새로 들리고
소리들 모여 사는 낮은 산에 싸여
한평생의 저녁은 이렇게 오던가.
푸른 구름의 너그러운 나그네 말이 없고
그 백수의 풍경만 나를 채우네.

오, 가을 산에 모인  빛,
죽은 나뭇잎의 찬란한 색깔,
그 영혼의 색깔,
숨어 살던 내 바람까지
오색의 춤판이 되어 돌아오네.



https://youtu.be/qJYUsGVkpp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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