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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샛별 May 17. 2022

들깨, 향긋한 그리움을 먹다

마종기 시 깨꽃'을 읽으며




어릴 적 따로 뿌리지 않아도 들깨는 참 무성하게도 밭 여기저기서 자라나곤 했다.  가장자리 한편에 돌보아 주지 않아도 무성하던 그 들깨밭.

그래서 였을까. 여름날, 밥상 위에는 샘물 오이지냉국, 호박 새우젓 찌게, 가지무침, 그리고 빠지지 않는 것이 있었으니 깻잎찜이었다. 풋고추를 다져 만든 양념장을 위에 얹어 불김만 한 김 쪼인 깻잎찜. 하얀 밥 위에 한 장 얹어 입에 넣으면 퍼지던 은은한 향기.


들깨를 떠올리면 가을날 쌓아 놓은 들깨 단과 함께 한 엄마의 모습이 보인다. 밭 한 귀퉁이에 깐 자리 위에서 흰 수건을 머리에 쓰고 깨를 털던 모습이. 가만가만 툭툭 두드리면 때글때글 여문 알들이 쏟아지던 정경, 모은 들깨 알들과 섞인 검불이나 쭉정이들을 제거하느라 키질을 하던 모습이.


저절로 자라나리만치 흔한 들깨지만 버릴 것이 없다. 잎은 찜으로 꽃은 부각으로, 빼곡히 난 작은 싹들은 맞춤한 것만 남기고 삶아서 나물로. 씨앗을 얻으려 조금 더 잘 키워낸 들깨는 거칠게 빻은 것은 그 나름대로, 고운 것은 차로, 그리고 향긋한 기름으로 거듭난다. 채식주의자에 가까운 나에게 들깨는 아주 좋은 음식이다. 들깨수제비, 들깨탕, 굵게 타갠 들깨를 넣은 나물무침, 깻잎장아찌, 깻잎김치, 깨꽃 부각 등등 나는 들깨가 든 음식들을 참 좋아한다.


언젠가 시어머니가 보내주신 깻잎김치가 너무 맛있어서 어머님께 배워보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여름휴가차 내려간 시골집에서 어머니가 김치를 담으셨다. 굵은 국멸치와 감자와 대파를 넉넉히 넣고 푹 고은 다음 거른 국물로 김치 양념을 만드시고는 깨끗하게 씻어 물기를 걷은 깻잎을 몇 장씩 양념에 적셔 차곡차곡 용기에 담아 내게 주셨다.  김치를 맛있게 먹고 기억을 더듬어 몇 번 해 보았지만 그 맛을 내기는 왜 그리 어려운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내가 만든 자신 없는 깻잎김치를 제삿날 일찍 도착한 시동생 밥상에 내놓았다. 어머니 김치보다 한참이나 심심한 깻잎김치를 시동생은 엄마 맛이 난다며 맛있먹었다.

또 다른 깻잎찜의 추억은 소금물에 삭힌 깻잎을 깨끗이 헹구어 켜켜이 간장 양념을 한 뒤 밥솥에 쪄낸 친정 음식의 기억이다. 따끈한 밥 한 수저에 거뭇한 한 잎을 올리고 한입 크게 베어 물면 고기반찬이 부럽지 않았다.


엄마가 해 준 음식의 기억이 내게 남아 깻잎을 좋아하듯 내 아들들도 깻잎 요리를 좋아한다. 집에 함께 있는 아들에게는 해줄 수 있지만 타국에 있는 아들에게는 해줄 수가 없어 아쉽다. 언젠가 아들과 통화를 하다 보니 한국식품점에서 깻잎은 자주 찾기 어렵고 비싸단다. 깻잎이 그리워 화분에라도 심어볼까 하는 아들 이야기가 서글프게 와닿았다.

아들의 깻잎 사랑.
농밀한 고국의 짙은 향기.
그는 늘어만 가는 그리움을 먹는가.


당연하게 여름이면 무성하게 자라는 그 깻잎이 먼 타국에서는 얻기 힘든 그리운 맛이라니. 천덕꾸러기처럼 무성하게 자라던 것들이 쉽게 얻을 수 없다니..




어느 날 마종기 시인의 글 속에서 깨꽃 이야기를 만났다. 그의 시 '깨꽃'과 함께.


깨꽃

    

헤어져 살던 깨알들이 땅에 묻혀 자면서 향긋한 깻잎을 만들어 내고, 많은 깻잎 속에 언제 작고 예쁜 흰 깨꽃을 안개같이 뽀얗게 피워놓고, 그 깨꽃 다 보기도 전에 녹녹한 깨알을 한 움큼씩 만들어 주는 땅이여. 깨 씨가 무슨 흥정을 했기에 당신은 이렇게 농밀하고 풍성한 몸을 주는가.


그런가 하면, 흐려지는 내 눈에는 잘 보이지도 않는 꽃씨가, 어떻게 이 뒤뜰에 눈빛 환해지는 붉은 꽃, 보라색 꽃의 연하고 가는 피부를 만드는가. 땅의 염료 공장은 어디쯤에 있고 봉제 공장은 어디쯤에 있고 향료 공장은 또 어디쯤에 있기에, 흰 바탕에 분홍 띠 엷게 두른 이 작은 꽃이 피어 여기서 웃고 있는가.


나이 들수록 남들이 다 당연하다며 지나치는 일들이 내게는 점점 더 당연하지 않게 보이는 것은 내 분별력이 흐려져가기 때문인가. 아무려나, 흐려져가는 분별력 위에 선 신비의 땅이여, 우리가 언제 당신 옆에 가면 그때부터는 당신의 알뜰한 솜씨를 다 알아볼 수 있겠는가. 흙이 꽃이 되고 흙이 깨가 되는 그 흥겨운 요술을 매일 보며 즐길 수 있겠는가.


늘어만 가던 궁금증이 하나씩 해결되는 깨알 같은 눈뜸이여, 나는 오늘도 깨꽃 앞에 앉아 아른거리는 그 말을 기다리느니, 어느 날 내 몸도 깨꽃이 되면 당신은 내 말과 글이 드디어 향기를 가지게 된 것을 알 수 있겠는가. 부르고 싶었던 노래를 찾아 헤매던 날들은 지나고 드디어 신선한 목숨이 된 나를 알아볼 수 있겠는가.


 남들이 당연시하는 것들을 당연 치 않게 보게 된 것이 가는 나이 들어 흐려져가는 분별력 때문인가라고 이야기하지만 나에게는 깨알 같은 눈뜸으로 신비한 땅, 생명의 신비함바라보는 그 나이 작가의 눈이 너무도 경이롭다. 깨꽃 이야기를 풀어놓은 그 글에서 그는 땅의 신비와 땅의 역할을 새롭게 인식하고, 그 체험이 신비의 체험이었다고, 당신의 혼을 한껏 고양시켜 주었다고 썼다. 또한 라틴어로 겸손한 마음을 후밀리타스(humilitas)라고 하는데 이 단어의 어원이 흙 또는 땅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땅과 같은 겸손을 감히 실행하며 살 수 없다면 자주 그런 겸손을 생각하며 반성하고 경외하면서 하루하루를 살고 싶다는 이야기로 글의 끝을 맺었다.

(별, 아직 끝나지 않은 기쁨, 산문'깨꽃이 피기까지'에서)


야생화를 매우 좋아하는 지만 좋아하는 음식의 재료인 들깨의 꽃은 아이 적부터 노년이 되기까지 한 번이라도 관심 있게 가져본 적이 있었던가.

너무도 작고 잘 보이지도 않는 예쁜 흰 깨꽃이 안개 같이 뽀얗게 피어난 것을, 깨꽃 다 보기도 전에 그 속에 향기롭게 여물어 가는 들깨 알의 신비를.


깨꽃이 피는 날들, 여물어 가는 날들을 올 해는 묵묵히 그리고 사랑스럽게 지켜보고 싶다.

땅의 신비로움을 돌아보고 시인의 겸손한 마음을 되새기며 많은 이들에게 큰 그리움으로 기억되는 그  향기를 맘껏 들이마셔 보고 싶다.




오늘은 깻잎을 사러 갈까.

소금 절임을 만들어 잘 보관했다가 오랜만에 돌아온 아들이 오래 고국의 맛을 느낄 수 있도록  떠나는 손에 들려 보내볼까. 

 그리움을 함께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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