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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샛별 Jul 01. 2021

온전한 나의 위로

한 무리의  꽃들




샤스타 데이지 꽃이 피었다.
너무도 좋은 날이었다.


2주 전, 작은 사고로 잠시 쉬고 나서 돌아온 다음 날이었다. 열린 하우스의 틈 사이로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갓 피어난  송이 꽃들을 바라보는 일은 아주 즐거웠다. 일하는 것이 흥겨웠다.

긴 시간이 지나 쉴 참이었다.

굳은 몸 상태를 인지했더라면 쉬어야만 했었다. 피어난 꽃들을 가까이서 바라보며 즐겼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한 가지만 더, 하고 욕심을 부린 것이 화를 불렀다. 내일 비가 온다기에 몇 개의 만수국을 옮겨 심는 중이었다. 마지막 남은 한 개를 심고 일어서다가 그만 중심을 잃고 언덕 아래로 구르고 만 것이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뚝뚝 떨어지는 피. 꽤 심하게 다쳤다.

CT를 찍고 엑스레이를 찍고 여러 바늘을 꿰매어야 했지만 더 크게 다치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결국은 몇 주를  쉬어야만 했다.




일이 계속 꼬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한 템포 쉬어 가라는 신호가 여기저기서 울린다. 알아차림이 필요한 순간이다.

쉬어가면 좋았을 것을... 가끔은 열심히 뒤도 안 보고 살던 습관이 계속 일을 하게 한다. 그리고 그것이 도가 지나치면 무슨 일이 일어 나고야 만다.

특히나 하고 싶지 않은 일에 어떤 의무감 때문에 엮여서 흘러갈 때, 전혀 다른 성향의 일을 해야만 할 때가 그렇다. 조금 힘을 빼도 좋으련만 부담이 클수록, 하기 힘든 일일수록 나는 꾹 참으면서 지치도록 그 일을 계속하는 성향이 있다.

그럴 때면 나를 이야기할 수 있는 무엇인가로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말이다.


농사일을 하는 이들은 빈 땅을 참기 힘든 것인가 보다.  하우스 주변 작은 자투리 땅이라도 상추며, 쑥갓, 호박, 파 등을 심는다. 어느 주말 농장을 하는 작가님이 한, 두 평만으로 당신의 가족이 먹기에 넉넉하게 채소를 얻었다고 하셨는데 이곳에서는 어디에나 넘치는 것이 채소인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은 많은 양의 채소는 그대로 버려두거나 불필요하게 많은 양의 김치를 담는 부담을 얻게 되기도 한다.


거기에 꽃을 심고 싶었다.

그러나 시골에 내려와 보면 어느새 이곳저곳  빼곡하게 새로운 작물들이 심겨있었다. 심어놓은 꽃들 곁이든, 하우스 안이든 자투리 땅이 보이기만 하면 콩이며 옥수수, 호박, 쑥갓, 상추 등을 심는다. 남편보다는 조금 어려운 도와주는 가족 중 한 사람이 하는 일이니 어쩌겠는가. 상주하는 이가 아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잡초 가득한 곳, 돌들이 많은 곳에 꽃들을 심을 수밖에. 거친 땅에서 잡초와 싸우며 심은 꽃들의 성장은 느리기만 했다.

더구나 농사일에 서툰 내가 마음 붙이고 쉬어가는 일이기는 했지만 꽃을 심는 일은 농사를 짓는 이들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일이 었을 것이고 나 또한 꽃을 심으면서도 은근히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그렇게 애써 심었던 샤스타 데이지들이 잡초들 속에서도 꽃들을 피우기 시작했고 그 기쁨은 더 욕심을 불렀던 것일까. 돌들을 골라내고 하우스 귀퉁이에 마련한 언덕 끝 아주 작은 공간에  호박 덩굴 곁에 있어  짓눌릴까 염려스러워진 만수국을 부랴부랴 옮기는 중이었다.

애써 담담하려 해도 답답한 마음은 감출 수가 없었던지 꽃을 옮기는 손끝에 힘이 들어갔었던가 보다. 나다움을 지키고 싶은 굳은 마음과 함께.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작은 .

역할에서 오는 부담감에 짓눌릴 때면 나는 그들로 스스로를 위로하곤 했다.  

그것은 때로는 아주 향기 진한 한 잔의 커피이기도 했고, 한 다발의 프리지어 이기도 했고, 한 권의 책 또는 달콤한 도넛 한 봉지 이기도 했다.

꽃을 심는 일도 그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낯선 농사일이라는 일 앞에 떠밀려오는 <남편과 함께 가야만 한다는> 부담감을 벗어나려면  열심히만 하는 나의 루틴에서 벗어나야만 했었지만... 생각과 행동은 달라서, 같이 하기에는 어떤 어짐이 필요했었나 보다.




다시 돌아보는 그날.


그 언덕 아래.

무엇을 버려야 할까? 반복해서 생각했던 '나 다움'의 염원이  피를 철철 흘리며 뒹굴고 있었다.


사막 한가운데서 떨어져 갈증에 시달리다 발견한 한 개의 오렌지. 친구와 나눈 오렌지 반쪽을 빨아먹으며 별똥별을 세는 순간 완전한 행복을 느꼈다는 생떽쥐베리.

그가 느꼈던 오렌지 한 개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죽음을 선고받은 듯한 상황에서 얻은 기적과도 같은 과일의 맛을 느끼는 즐거움을. 깨어진 머리와 가슴 통증으로 긴 시간을 보내면서도 나는 피어나고 있던 꽃들의 하얀 얼굴을 그리워했다.


몇 주가 지나갔다.

깨어진 상처가 아물고 이제 다시 돌아와 꽃들을 새롭게 바라본다. 기적과도 같은 오렌지 한 개의 완벽한 기쁨을 닮은 마음으로.

그저 돌밭에서 피어난 꽃무리들을 행복하게 바라보기만 하리라 생각한다.  



마음으로 몇 번이나 읊조리던 글귀가 있었다. 알고는 있으나  행동으로 스며들지 못한 글귀.

의식적으로 더 많이 내려놓을수록 나의 마음과 생각에 더 깊이 평안이 찾아드는 것을 보았다. 내 욕구와 기대를 버리고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일 때 하루하루가 훨씬 좋았음을 내가 뭔가를 아무리 꽉 쥐어도 내가 그것을 그대로 지키거나 영원히 지속시킬 수 없음을. 무엇이든 귀한 것일수록 움켜쥐지 말고 그것을 든 손을 감사함으로 펴라. 그럴 때 삶은 더 순탄해진다.
- 조이스 랩


이제야  어찌할 수 없는 이들은 마음에서 비우고, 고집해온  소중한 나다움에의 집착 또한 버리기로 다. 


그저 꽃을 심을 곳이 있음을.

돌밭이지만 피어난 나의 꽃들이 주는 기쁨의 순간을 온전히 누리기로 한다.



4월에 심은 키작은 한련화가 꽃을 달았다



몇 번을 심어서야 겨우 싹이 튼 채송화의 새싹


깨어진 머리를 얻고서야 평화를 얻었다.

그 돌밭에서도 채송화는 싹이  키 작은 한련은 붉은 꽃을 달았다.


이제 조금은 더 힘을 빼고 시골에서의 인생도 천천히 사랑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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