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산마늘 하우스에 개가 산다. 겨우내 집에 살다가 봄산나물이 올라올 즈음이면 올라와 바쁜 주인 대신 하우스를 홀로 지키는 개다. 고라니 같은 야생동물이 출현해서 하우스를 망가뜨리기도 하기 때문에 일 년 내 잘 키운 농작물을 지키는 일을 하느라 하우스만 있는 외딴곳에서 지낸다. 근처에 있는 한적한 밭 한 귀퉁이에서도 누렁이처럼 주인의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덩그러니 밭을 지키고 있는 개를 보았다. 타의로 외딴곳에서 사는 그들의 삶은 어떨까? 하우스에 갈 때마다 개들을 살펴본다.
누렁이는 풍산개이고 아주 덩치가 크다. 처음 만났을 때는 녀석의 큰 덩치에 압도되어 먼발치에서 "안녕!" 인사만 건넸다. 아무리 개를 좋아하는 나더라도 녀석의 큰 덩치가 부담스러웠던 탓이다.
그런 누렁이의 목줄이 풀렸다. 자유의 몸이 되어서 어디든 갈 수 있으련만 녀석은 하우스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도 사람 곁에는 가까이 오지도 않았고 짖지도 않았다. 수확철이라 바쁜 주인이 멀리 다른 밭에 가서 오지 않는 며칠 동안 풀려난 누렁이와 자주 만나게 되었다. 이웃 하우스가 거처인 녀석은 만날 때마다 이리 오라 불러도 일정 거리를 두고 종일 그 주위를 맴돌기만 한다. 하우스 안에서 김을 매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놀라 돌아보았더니 근처에 와있는 녀석을 볼 수 있었다. 고맙게도 내가 늘 다정하게 불러 주어서였던가 정이 그리웠던지 녀석이 거리를 좁혀 아주 조금씩 가까이 오더니 한 번은 근처를 지나던 녀석의 코끝이 내민 내 손에 살짝 닿았다. 그날 이후 누렁이는 점차 곁을 내주어 우리는 서로 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녀석은 꼭 주인아저씨 말만을 듣는다고 했다. 아저씨 대신 근처 밭에 일하러 오신 주인아주머니가 녀석을 애타게 불러도 힐끗 한 번 보고는 비탈진 산마늘 밭을 누비는 녀석이었다. 바람에 일렁이는 넓은 산마늘 밭의 초록빛 파도를 타고 헤엄치는 그는 오랜만에 만난 목줄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영혼이다.
그런 그의 자유생활은 며칠 후 주인아저씨가 오시고서 끝이 났다.
그날 산마늘 밭을 헤엄치던 누렁이의 얼굴에서 나는 쇼생크탈출의 주인공이 탈출 후 하늘을 바라보며 빗속에서 표효하는 얼굴을 보았다. 그러나 그는 떠나지 않았고 다시 그가 사랑하는 주인의 그림자가 되었다.
저녁 어스름이 내리는 시간, 근처에서 음울한 고라니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때가 되면 인가가 먼 하우스에서 홀로 보내는 외로운 시간이 서글퍼서인가 항상 누렁이가 서글프게 운다. 개를 키워본 경험에 비추어 저 울음소리는 외로움에 못 이긴 하울링이다. 그는 외롭다. "거기 누구 없오! 나 여기 혼자요!"
어스름이 내려앉는 시간 집으로 돌아오기 전 누렁이를 보러 가기 시작했다. 이름을 부르고 눈을 맞추고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녀석은 기쁘게 살랑살랑 꼬리를 치다가 내게 다정하게 비비며 몸을 맡긴다. 정감 어린 눈빛을 하고서. 나는 이제 마트에 장을 보러 가면 누렁이 간식을 챙긴다.
녀석은 늘 상주하지 않는 내가 도시에 왔다가 한참만에 돌아와 만났어도 참 나를 반갑게 맞아준다. 주인아주머니 섭섭하실 만큼.
한 시즌을 다 보내고 날씨가 추워지는 어느 날 누렁이는 한 해의 임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누렁이가 떠나고 조금 한가한 날 남편의 농사 멘토이신 누렁이네를 방문하게 되었다. 다른 개 친구들도 여럿인 집에서 사는 누렁이. 겨울이면 집에서 지내시는 주인아저씨를 바라다보며 집을 지키고 있는 순한 녀석의 얼굴이 너무도 편안하고 행복해 보였다. 녀석과 반갑게 인사하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네가 행복해 보여서 참 좋다" 귀엣말로 하는 나의 이야기를 누렁이는 아는듯한 얼굴로 나에게 자꾸만 얼굴을 비벼대었다.
(네 눈 박이 진도 블랙탄)
나름 개사랑이 넘치는 내가 개에게 물렸다. 아주 심하게. 팔과 다리를 열몇 바늘을 꿰매고 스테이플러를 닮은 기구로 박아야 했다 부끄럽게도.
2021년의 일이다. 그해는 시골살이가 힘겨웠던지 언덕에서 굴러 머리를 다치기도 한 힘든 해였다.
나를 문 개. 그는 남편 친구의 개였다. 시골에서도 외곽에 집터를 장만한 그 친구는 새로 집을 짓기 전 덩그러니 빈 터에 철망이 처진 개집을 두고 개를 키우고 있었다. 농사일을 하기 전 그 빈터에는 작은 닭장도 있어서 남편은 그곳을 빌려 닭을 몇 마리 키웠다. 하루 한 번 그곳에 들를 때마다 남편은 탄이 밥을 챙겨주었고 나 역시 자주 주인이 들르지는 않는 듯 비어있는 물통에 물을 채워 주던 바로 그 녀석이다. 집을 다 짓고 입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암선고를 받은 친구는 개와 닭을 돌보는 일을 남편에게 부탁했고 바쁜 우리일 틈틈이 그곳에 들르던 어느 날 그런 일이 생긴 거다.
이제는 밖에 묶여 있는 개는 심하게 짖는 편이었다. 나는 진돗개의 특성이 주인에게만 충성한다고 했으니 그러려니 했다. 그날, 개를 묶은 줄이 그만큼의 탄성이 있는 줄을 모르고 남편곁으로 다가서는 순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당황하지 않고 개를 밀어내었지만 악착같은 녀석의 힘에 당할 재간이 없었다. 피부에서 지방질이 밖으로 솟구칠 만큼 상처가 났다. 나의 불찰이다. 개를 겁내지 않았던.
나중에야 알았다. 녀석은 홀로 있을 때 밥을 주던 남편과 남편의 친구를 제외하고는 곁을 주지 않아서 이미 몇 사람을 문 전력이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왜 집을 지키던 그 집의 아들이 개밥을 주지 않는지 궁금했던 우리는 남편이 다른 일로 그 집을 돌보러 가지 못한 시기에 어쩔 수 없어 밥을 주게 된 그 집 아들이 심하게 물려 입원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을 듣게 되어 그 궁금증이 풀렸다. 식구들을 무는 개였어도 좋은 품종의 새끼를 얻고자 했던 친구는 결국 그 개를 처분했단다.
내가 느낀 것은 개들이 다른 품성을 지니게 되는 이유는 품종의 문제만은 아닌 듯하다는 것이다. 여기저기 우리 곁의 반려견과 시골개들을 다시 바라본다. 누렁이 역시 자신에 대한 애정을 주는 주인아저씨를 제외한 가족 누구에게도 곁을 내어주지 않던 개였지만 나에게 그 깊은 정을 내어주던 것은 사람에 대한 믿음이 심성 속에 채워져 있고 개사랑의 DNA를 감지하는 능력이 있어서 나와의 교감이 가능했던 것일까? 풀어진 채로 키워지던 내 어린 시절의 개가 누구를 물지 않고 자유롭게 살았던 것은 오늘날처럼 먹는 것이 풍족하지 않았어도 밥을 같이 나누어먹는 식구로서 주인에 대해 지닌 신뢰가 곧 사람들에 호의적인 시선을 갖게 하지는 않았을까?
결국 도시이든 시골이든 신뢰가 개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믿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주인이 얼마나 진심으로 그를 대했는가 하는 점이 개에게 있어 최고의 미덕인 의심 없는 신뢰관계를 얻게 하지는 않았을까?
사실 그날 나는 그 개를 탓하지 않았다. 그의 처지가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상황이 되었을 때 개를 키우지 않고 홀로 황량한 공간에 개를 살게 해서 그런 심성을 키워낸 남편의 친구를 잠시 원망했고 그 순간에 처한 내 부주의를 인정했다. 그 이후 생긴 트라우마로 등골이 서늘한 느낌은 누렁이를 만나서 서로 즐겁게 시간을 보내면서도 그날의 일이 준 공포감을 없애는 데는 꽤 시간이 걸렸다.
도시에서 개를 오래 키우면서 시골에 사는 개는 좋을 줄 알았다. 직접 접하기까지는.
우리네 인생처럼 견생 역시 그런 듯하다. 시골에 사는 것이 자유롭고 평온한 삶이라면 조용한 시간 속에 깃들어있는 외로움 또한 감당해야 하는 것이고, 도시의 아파트 안에서 산책을 목마르게 기다리는 반려견의 견생 역시 도시의 좁은 공간에서 부대끼고 자연을 그리는, 편리함과 바꾼 도시에서의 우리네 삶과 같다.
이런저런 사람의 생각으로 개를 바라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짧은 줄에 매여 차가운 곳에서 잠드는 시골개들이라 해서 누가 그를 불쌍한 견생이라 할 수 있을까. 도시이든, 시골이든. 주어지는 환경이 어떠하든. 신뢰가 바탕이 된 관계일 때 그 견생은 행복한 것을.
내가 본 시골개는 짧은 줄에 매여서 주인조차 먼 발발치에서 바라보아야 하거나 또는 홀로 빈 하우스를 지키는 삶이었다. 그러나 누가 알겠는가? 내리는 빗줄기를 직접 맞고, 자연 그대로의 풀꽃냄새와 바람을 느끼며, 구름을 바라보고, 새소리와 나비의 팔랑거림을 보며 유유자적 그 삶을 즐기고 있는지... 그들에게 그건 위안이 아니라 즐겨야만 하는 삶 자체일지. 그들은 그것을 온전히 수용하고 있는지.
나는 시골의 삶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외로운 시간에 녀석이 운다. 원망이 아니라 단지 그를 홀로 둔 사람이 그립다고. 그는 주인을 사랑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