썸머
2019
비 온 뒤 싱크대 앞 큰 창이 환하다. 평소 기력 없던 이웃의 하양 개가 볕이 좋아선지 꼬리를 동글게 말고 목을 바짝 세운다. '대문 앞으로 누가 지나가기만 해라!' 이내 심드렁해서 흙 마당에 늘어지게 앉아 왼쪽 뒷다리로 반대쪽 귀를 유연하게 긁적인다. 밭 한가운데로 누렁개 한 마리가 모른 척 지나다가 멈춰 서서 몸을 슬쩍 비비며 서로 탐색 중이다. 감나무 아래는 동네 고양이들이 이따금 들르는 코스다. 참새들은 고양이를 피해 감나무, 호두나무로 날아올랐다가 우르르 곡예비행을 한다. 반대로 고양이들은 수풀에 숨었다가 날름대며 새 잡는 시늉을 한다. 까치는 성깔 있는 봄바람에 휘청거리는 살구나무 그림자를 밟고 느릿느릿 걷다가 옥상까지 접수했다. 마당을 콩콩 뛰던 참새와 까치들까지 빗물 웅덩이에서 물장구치듯 부리와 날개를 첨벙이며 목욕을 한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 소란스럽다. 텃밭 경계에 일렬로 핀 노랑 수선화가 한창이고 시퍼런 대파 밭 한 조각, 하양 꽃이 몽글몽글한 감자밭 몇 줄. 상추, 쑥갓, 부추....
세상 구경하듯 창밖 풍경을 훔쳐본다.
“얘! 황태!”
우리 집 마당 끝에 눌러앉은 치즈 태비 고양이 황태와 노랑 눈을 가진 깜장 고양이가 어슬렁어슬렁 지난다. 창유리를 두드리며 큰소리로 부르니 두 마리가 동시에 고개를 쑥 뺀 체 어리둥절해한다. 반가웠나 보다. 불러주는 것만으로.
간 밤 내린 빗줄기에 방충망이 닦였는지 바깥 풍경이 선명하다. 안성천 둑길이 보이는 이층 창은 물론이고 마당이 보이는 사방 창문마다 초록 특집이다. 얼마 전 논바닥에 한나절 트랙터가 심은 모가 그새 자라 빳빳해졌다. 셉 그린, 올리브 그린 물감을 풀어 붓끝으로 쓱쓱쓱. 마치 모 심듯이 쪼르르. 뒷줄은 조금 약하게. 앞쪽 모는 좀 더 굵게. 간혹 선명해 보이게 툭툭 모를 박는 거야. 둑길 위 큰 나무는 팔레트의 넓은 칸에 초록, 올리브 그린, 옐로 그린, 프루션 블루를 섞어서 큰 붓에 흠뻑 적신다. 종이 위에 나무의 큰 뭉치만큼씩 펼쳐놓고 때론 번지도록 아니면 마르고 난 뒤 겹쳐 칠한다. 나뭇잎이 휩쓸리는 바람 방향, 빛과 어둠을 따라 이파리들을 풀풀풀, 무심히 툭툭 또는 촘 촘 촘 촘. 볕은 따갑고 눈부신 계절이니 초록 스펙트럼을 잘 봐야지. 하늘은 구름이 만들어 놓은 모양을 따라 그려보는 거지. 보이는 건 그리고 안 보이는 건 안 그리면 돼. 흐릿한 건 흐리게 선명해 보이는 건 맑게 선명하게. 이대로 수채 풍경화 완성이다.
으스스 비 온 뒤 바람 부는 날엔 어쩐지 팔다리가 감전되는 것 같이 써늘하다. 이런 날엔 '떼구루루 딱딱. 딱' 이따금 이런 소리를 듣는다. 어, 고양이인가? 잘못 들었나? 알고 보니 작업실 지붕 위로 떨어지는 오동나무 꽃받침이다. 오월 피기 시작한 보라색 꽃들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다음으로 꽃받침과 떡잎이 떨어진다. 다음은 연둣빛 잎이 나기 시작한다. 드디어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를 따라다니며 날마다 꽃을 쓸 시간이 온 것이다.
강아지 페이와 맨발에 슬리퍼를 끌고 마당으로 나선다. 텃밭에 쓰러진 고춧대를 꾹꾹 밟아 세우고 상추를 뜯고 부추 몇 무더기를 싹둑싹둑 가위로 자르니 두 손이 모자란다. 아침볕에 데워진 공기가 후텁지근해지고 바람은 잔다.
도서관 가는 날이라 조금 부지런을 떤다. 큰 가방에 포트폴리오를 대신할 그림책과 참고 자료, 인쇄물을 챙겼다. 그림책 수업 첫날이라 원피스를 입었다. 둑길로 들어서서 큰 나무쯤 도달하니 바람이 시원하다. 하아! 크게 숨을 내쉬고 목이 꺾이도록 나무를 올려다본다. 바람 세탁소. 많이 컸네! 처음 이사 왔을 때, 그러니까 15 년은 지났나 보다. 평평한 들판뿐인 동네로 들어서는 둑길 중간에 있는 나무가 심심함을 덜어주었다. 나만의 등대처럼 어디에서 봐도 늘 깜박이는 것 같았다. ‘바람 세탁소’라는 이름을 붙여 줄 만큼 바람소리가 시원스럽고 멋지다. 버스정류장까지 걷는 내내 안성천 줄기 따라 초록 들판이 파도처럼 넘실댄다. 가을이면 어른 키 훌쩍 넘는 억새들이 바람 따라 서걱서걱 축제를 연다. 좋다 좋아! 집으로 가는 방향이나 시내로 나가는 길이나 길 끝 소실점을 향해 때론 웅장한 노을까지 덤으로 감상하며 걷곤 한다. 큰 나무를 지나 주유소 앞에 이르자 햇빛이 눈부셔서 양산을 폈다. 횡단보도를 건너자마자 15번 버스가 도착해서 바로 올라탔다. 마침 에어컨 바람이 시원한 곳에 섰다. 오늘은 다른 날에 비해 운 좋은 날이다. ‘딩동, 다음 정류장은 평택 시장로터리 여름 앞입니다.’ 내가 탄 버스는 봄을 지나 여름으로 안전 운행 중이다. 곧 Summer Drawing 시간이다.
* 이 글을 쓴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어쨌든 요즘 풍경이 딱 이래서.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