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 쓸 것이 없고 사건도 없으니 소소한 일상 수다마저 멈췄다.
너무너무 아무것도 안 하니 불안했다. 알량한 소신마저 까먹고 하루하루 양심을 야금야금 베어먹으며 살찌우고 있지 뭔가. 평생 꿈이라던 그림그리기에 필요한 재료들이 이방 저방 마루까지 널브러져 있는 게 맘에 걸려 캑캑거렸다. 늦은밤 방안을 어슬렁대다 쨍한 파랑과 초록색 잉크를 주워들었다. 쨍한 색은 별로라 두 색을 섞고 하양 종이는 겁나니까 오랜 단어장 몇 장 북 뜯었다.
싸구려 붓으로 푹 찍어 새의 실루엣을 그리다가 뭐 이리 못하는건지 때려치워야 하는 거 아니야? 언제나처럼 버릇처럼 투덜대는 마음을 꼭 붙들어 앉히고 고양이 몇 마리도 그린다. ㅎㅎ 이럴 줄 알았지. 다시 오일 파스텔로 수정하고 잉크로 바깥모양을 깎아내고 ....
이렇게 놀면 되는 거 아냐? 차츰 나답게 뻔뻔해진다. 예전 쓴 글에 새벽달 하나 그려놓고 노트에 드로잉한 지루한 그림 위엔 잉크로 그린 종류를 알 수 없는 새와 어설픈 고양이까지 찢어 붙였다.
양심 고백하듯 늦은 밤에서 새벽까지 그 잘난 예술 저 바깥에서
내 맘대로 놀았다.
어쩌다 보니 모두 파랑. 흠. 좋아좋아!